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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정리하고 길 안내 … ‘ 골프장 주인’들이 허드렛일 자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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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호 20면

18홀을 끝낸 김경태 선수(오른쪽)를 향해 갤러리들이 몰려들자 한 자원봉사자가 “질서를 지켜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KPGA 제공]

골프장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바람이 불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됐다.
골프장 회원들은 대부분 사회·경제적으로 지위가 높다. 그동안 골프장 회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중요시해 왔다. 수도권 명문 골프장에서 프로 골프대회가 열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회원들의 반발 때문이다. 고가에 회원권을 구입한 회원 입장에서는 대회 때문에 자신들의 라운드 권리를 양보해야 하는 게 탐탁지 않다.

골프 한·일전서 빛난 노블레스 오블리주

메이저 대회인 KLPGA선수권대회는 2001년부터 2009년까지 경기도 여주군의 J골프장에서 열렸다. 메이저 대회임에도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3라운드로만 열렸다. J골프장은 ‘2010년부터는 메이저 대회는 4라운드로 한다’는 KLPGA의 방침이 정해지자 대회 개최를 포기했다. 회원들이 강하게 반발해 주말까지 대회 기간을 연장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4라운드로 열리면 프로암과 공식 연습 라운드를 포함해 최소 일주일은 일반인의 코스 사용이 어렵다. J골프장뿐 아니라 대부분의 회원제 골프장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시카와 료, 한국말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일부 회원제 골프장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 남자 골프의 자존심을 건 KB금융 밀리언야드컵이 3일 경남 김해 정산골프장에서 끝났다. 지난해 1점 차로 패했던 한국은 11.5대 8.5로 승리했다. 경기 내용뿐 아니라 운영 면에서도 대성공을 거뒀다. 일본팀 단장 아오키 이사오는 한국팀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대회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벙커를 정리하고 있는 자원봉사자.

이번 대회에서 정산골프장 개인 회원 100명 가운데 45명이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이들은 자비를 들여 유니폼과 모자를 맞췄고 5개 조로 인원을 나눠 경기 진행, 벙커 정리, 연습장 관리, 통역·안내 등을 맡았다. 이번 대회에서 특이한 점은 벙커에 고르개가 없었다는 것이다. 자원봉사자들이 벙커 정리를 맡았다. 자원봉사단의 양우석(56·금강전기공업사 대표) 단장은 “브리티시 오픈에는 벙커 고르개가 없고 자원봉사자들이 벙커 정리를 한다. 벙커 고르개가 경기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 힘들었지만 보람있었다”고 말했다. 양 단장은 휴대용 벙커 고르개 20개를 직접 제작해 자원봉사자들에게 나눠줬다. 양 단장은 “기존 벙커 고르개는 너무 크고 무거워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집에서 유리창을 닦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 알루미늄을 이용해 접이식으로 만드니까 가볍고 휴대하기도 편했다. 아오키 단장도 일본에서 사용해야겠다며 우리 제품을 갖고 갔다”며 웃었다.

경기 진행도 깔끔했다. 회원들은 오랜 구력과 뛰어난 골프 실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골프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일반 프로대회에서는 아르바이트 대학생들이 경기 진행을 맡는다. 골프에 대한 상식과 전문성이 떨어지다 보니 경기 진행에 차질을 빚는 경우가 많다. 4월 경기도 이천에서 열린 발렌타인 챔피언십에서는 경기 도중 진행요원의 휴대전화가 울려 선수들이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또한 무리한 갤러리 통제로 진행요원과 갤러리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지난해 KLPGA투어 대우증권 클래식에서는 서희경이 아이언 샷을 하는 순간 갑자기 진행요원이 다가오는 바람에 미스샷을 했다. 이 한 샷으로 서희경은 우승 경쟁에서 탈락했다.

구력 길어 대회 진행도 매끄러워
한·일전 자원봉사를 맡았던 김상채(52·김해 중앙병원장)씨는 “친구들이 유명 선수들의 플레이를 곁에서 볼 수 있어 좋겠다고 부러워했지만 정작 선수들이 플레이할 때는 갤러리 쪽을 향하고 있어야 했다. 회원들은 오랜 구력으로 경기 흐름을 꿰뚫고 있다. 또 자원봉사자들이 거의 50대 이상이라 갤러리들이 통제에 잘 따라줬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오전에는 자원봉사를 하고, 오후에는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하는 강행군이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36홀을 돈 것처럼 몸은 힘들었지만 보람을 느꼈다. 그동안 골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회원 대부분이 오피니언 리더인 만큼 적극적인 자원봉사를 통해 골프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수들의 반응도 좋았다. 일본의 골프 스타 이시카와 료는 플레이 도중 자원봉사자에게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만족스러워했다. 양용은은 “PGA투어에서 가장 부러웠던 게 회원들이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이 문화가 정착됐으면 좋겠다. 골프를 잘 알고 있어서 편하게 플레이할 수 있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외국 대회에서는 회원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서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회원들이 갤러리 안내, 교통 정리, 쓰레기 줍기 등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한다. 그래서 우승자들은 항상 우승 소감을 말할 때 자원봉사자들의 노고에 대한 감사를 빼놓지 않는다.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은 폐쇄적인 클럽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여자 회원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회원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회원들도 마스터스 때에는 그린 재킷을 입고 자원봉사를 한다. 전 스타TV 회장인 크레이그 히틀리도 대회 기간 미디어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은 일반 골퍼들에게는 평생에 한 번 라운드하기 힘든 곳이지만 자원봉사자들에게는 플레이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다. 골프장 측은 매년 5월 여름 시즌에 대비하기 위해 휴장하기 직전 마스터스에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이들을 초청해 라운드를 한다.

이번 한·일전 자원봉사단 중 최연장자인 박태문(70) 회원은 “자원봉사를 하는 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니까 피곤한 줄 몰랐다. 이미 한국 골프 실력은 세계 최고다. 자원봉사 문화도 한 단계 성숙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회원으로 있는 골프장에서 대회가 개최되는 것은 잔치가 열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골프장의 주인인 회원들이 외부 손님들을 맞이하는 건 당연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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