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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의 50보 100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연초에 일본을 방문했던 필자는 언제나 처럼 들르는 아키하바라의 소프트웨어 판매점에서 예상치 못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기획 당시에만 소문난 잔치로 전락한 줄 알았던 〈알렉산더, アレクサンダ-戰記〉가 화제의 제 1선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만화영화계 추세가 완성을 시켜 놓고도 한참 있다가 공개하는 것이 붐(?)이긴 하지만(ex. 뱀파이어 헌터.D, 진로, 패트레이버-폐기물 13호..) 〈알렉산더〉의 경우는 작년 9월에 이미 상업 위성 방송 wowow 망을 통해 공개가 되어 신선도가 떨어졌음에도 올 상반기 일본 OVA계 최대 화제작으로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것이었다.(*현재 제 6권까지 발매)

그동안 SONY [AX]를 제외한 아니메 잡지들의 강력한 견제 때문에 언론 플레이를 거의 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결과라 의외가 아닐 수 없는데,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주제가의 빅 히트 때문으로 보아야 할 듯 싶다.

코야나기 유키(小柳ゆき)가 부른 〈알렉산더〉의 메인 테마곡 '당신의 키스를 세어 볼께요'가 이번주로 일본내 모든 가요 차트(오리콘, TV, 라디오..) 10위권 입성이 완료되었으며 현재의 인기를 반증이라도 하듯 긴급 발매된 동곡의 듀엣 버전까지 10위권 진입이 유력한 상황이다.

TV 만화영화의 주제가(혹은 일부 극장판 주제가)가 메이저계 가요 차트에 진입하는 경우는 많아도 매니아 장르인 OVA물의 주제가가 이 정도 인기를 누린 적은, 적어도 근시안적인 기억에는 사례가 없는 듯 싶다.

게다가 현재 이 곡이 여러 개의 TV 광고용 CM SONG으로 까지 더블 타이아프 되고 있기 때문에 어느새 익숙해진 멜로디에 '도대체 이게 무슨 노래냐?'는 물음표가 소문에 소문을 타고 전해져 현재 발매중인 〈알렉산더〉라는 OVA의 주제가임이 뒤늦게 확인되고 있다. 즉, 주제가의 히트가 이렇다할 광고 매체를 찾지 못해 긍긍하고 있던 〈알렉산더〉의 프로모션을 단단히 해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올해부터 본격적인 가속도가 붙고 있는 DVD 타이틀의 시장 점유 확산과 때를 같이하여 오리지날 소프트라는 메리트 때문에 DVD 업계에서 〈알렉산더〉를 엄청 밀어주는 양상까지 보이고 있는데, 이렇게되자 경영권 박탈 이후 카도카와 그룹에서 분가하여 독립 노선을 걷고 있었던 카도카와 하루키 사무소(*카도카와 서점과는 무관)의 첫번째 세계 합작 대형 프로젝트가 전화위복의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신주쿠의 명소 스튜디오 ALTA 옆에서 카도카와 하루키의 사인회가 있을 정도!)

단! 한가지 걸리는 문제가 바로 작품의 퀄리티 인데, 국내 영화제 상영 당시 냉담했던 반응과 무엇보다 프로모션 필름에 비해 현격이 다운된 본편 퀄리티에 필자 역시 아쉬움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음에도 정작 이 부분에 대한 일본내 평가가 상당히 의외다.

일본식 그림체에만 흥미를 느끼고 일본식 색감이어야만 마음에 들어하는 국내 애호가들과는 달리 일본에서 그동안 쉽게 접해 보지 못했던 피터 정의 국적 불명 이미지(일본식도 아니고 미국식도 아닌)에 일본내 매니아들이 상당한 호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현재 인기를 대변이라도 하듯 얼마전에 방송된 [Anima.ge TV] - 알렉산더 전기 특집 방송에 출연한 린 타로 감독(이번에는 프로듀서)의 답변도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세계 도처의 일본 아니메 매니아들이 대부분 일본식 그림체에 침식 당해 그것의 아류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은데, 피터 정은 일본 아니메 매니아이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크리에이터라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것이다.

물론 피터 정이 캐릭터 디자인(기타 비쥬얼 디자인 포함)만 담당하고 작화 감독을 맡지 않아 그의 유니크한 그림체가 본래 디자인대로 관리되지 못했고 또한 그것이 〈알렉산더〉의 퀄리티 추락에 결정적 이유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일본인들은 피터 정의 그림체에서 이전까지 일본 만화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색다른 매력을 발견한 듯 싶다. (방송에서도 피터 정의 사진과 상세 프로필까지 정리해서 보도)

이쯤되고나니 개인적으로도 비록 본래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 정도의 성과라면 나쁘지 않은 결과로 보여지고 카도카와는 〈로도스도 전기〉 이후에 또 하나의 대작 OVA 시리즈를 남겨 놓는 수확을 얻게된 것이다.

문.제.는. 그나마 합작이라는 명분은 달 수 있는 〈알렉산더〉가 아니라, 어떻게 〈건드레스〉와 같은 사생아가 합작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완전 개방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개봉이 될 수 있냐는 것이다.

작년 봄 일본 도에이계 상영관에서 미완성 필름으로 개봉하여 전례가 없는 AS 상영(극장에 온 관객들에게 완성 뒤 집으로 비디오 테입을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려 보냄) 해프닝을 연출하고 우여곡절 끝에 국내 개봉이 성사된 〈건드레스〉는 결과적으로 합작 시스템의 악습을 그대로 되밟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건드레스〉의 시사회 이후, 한국에서 그림을 그려서 그림이 후진 것 같다는 필자의 소견으로는 수긍하기 힘든 지적들이 있었다. 정말로 그렇다면 한국에서 그림을 그린 일본 만화영화들은 모두 후진 작품들이 되는 것인지 몇가지 추가 설명이 달려 있지 않는 한 그런 이야기에는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보다는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의 질이 상부 스탭이 누구냐에 따라 갈린다는 점에서부터 문제를 짚어 보아야 맞다고 사료된다.

예전에 친구가 PD로 있는 제작사에서 합작 프로젝트에 대한 오더를 일본에 넣었던 적이 있었는데, 구체적으로(금액이 얼마든 간에) 가와모리 쇼지씨를 감독(혹은 스탭)으로 기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보았다.

일본측에서 돌아 온 답변에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와모리 쇼지씨의 몸값 때문이 아니라(오히려 그건 중요하지 않았음) 가와모리씨가 감독이든 스탭이든 참가를 하게 될 경우 그와 손발이 많는 팀(최소한 스튜디오 누에)과 그들이 운용하고 있는 제작 시스템을 함께 고용해야 한다는 단서가 함께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국내 제작사에서 감당하기 힘든 조건이지만 그럼에도 이게 정답인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하면 사기는 당하지 않는 것이다.
〈헝그리 베스트.5〉가 왜 사기를 당했나? 〈정글 대제〉의 감독에게 농구 만화의 연출을 맡긴 것부터 넌센스였지만, 국내 기획진이 일본측 스탭의 개별 프로필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무조건 일본에 맡기면 하이 퀄리티의 작품이 나오는지 알고 정말 듣도보도 못한 제작사, 제작 스탭에게 전권을 위임하다시피 맡겨 놓았던 결과가 TV판 〈슬램덩크〉를 못 따라 가는 극장판 〈헝그리 베스트.5〉 아니었나.

적어도 한번 했던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때 발전이라는 단어와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국내 굴지의 영화 수입사가 똑같은 수법의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이 답답할 따름이다. 기대치를 밑돌았음에도 〈알렉산더〉 쪽에 한 발짝 더 나간 합작 만화영화라는 평가를 내려주고 싶은 것은 적어도 이런 식의 사기는 당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이것이야말로 '린 타로'라는 확실한 제작 지휘자와 '매드 하우스'라는 제작 시스템을 함께 고용했기 때문. 피터 정의 가세가 큰 플러스가 되었고)

물론 그럼에도 최종적으로는 〈알렉산더〉 역시 50보, 100보가 되어 버린 것은 이 작품의 공동 투자자인 삼성 역시 일본 쪽에 사기를 당한 것과 거의 유사한 꼴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영상 사업 진출 이후 연속적인 흥행 실패로 수백억의 손실을 남긴 삼성이 정작 영상 사업 포기 선언과 때를 같이하여 〈쉬리〉가 대박을 치고 포기 선언을 번복할 수 없어 결국 영상 사업단 문을 닫아 버리자 마지막으로 걸려 있었던 〈알렉산더〉 프로젝트가 이제와서 실효를 거두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카도카와 하루키는 삼성 돈으로 〈알렉산더〉 만들어서 재기를 하게 된 셈이 된 것이다.(일본에서 볼 때 한국은 참 고마운 나라다)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그렇다면 과연 〈알렉산더〉는 국내에 수입될 수 있을까? 라는 점이다. 수입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기서 왜 '수입'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수밖에 없느냐가 더 아이러니컬한 사실일 것이다.

분명 시작은 한일 합작 만화영화였는데 국내 수입사가 다시 판권을 구입해서 입양해 오지 않는 한 국내 공개가 사실상 불가능한 국제 미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뭐.. 일본에서 뜨고 있으니까 제 3의 수입사가 사올 수도 있을 것이고(하지만 그 사이 붙어버린 프리미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삼성이 다시 영상 사업을 시작할지도 모르니까(적어도 배급망은 있으니) 국내 공개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는 문제이긴 하다.

다만 합작에 대한 시행착오는 이제 이 정도 선에서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램해 본다.

※〈건드레스〉 그래도 괜찮았던 부분

사운드 믹싱 만큼은 지금까지의 국산(?) 극장 애니메이션들중 가장 상위 클래스의 점수를 주고 싶다. 그것은 음향, 음악 뿐만이 아닌 우리말 대사가 또렷이 들렸기 때문이다. (채널 분리도 확실하고..)

특히 인간의 귀로 판독이 불가능했던 최근의 모 작품을 떠올려 보자면, 적어도 이번에 〈건드레스〉에서 우리말 녹음 기술에 대해서 만큼은 최소한의 노하우가 확보되지 않았나 싶다.(외화들이야 자막을 읽게 되니까 대사가 잘 들어오지만, 자막이 없는 방화는 대사가 들리지 않을 경우 치명적이다)

그래서 이 부분 만큼은 좋은 점수를 주고 싶었는데, 이런.. 엔딩 크레딧에 우리말 녹음 스탭은 고스란히 빠져 있는게 아닌가! 아무래도 일본쪽에서 개봉된 프린트를 그대로 받아다가 그위에 그대로 우리말 트랙만 입혀서 개봉하느라 자막 수정은 손도 데지 않은 듯 싶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를 수정했다는 것인지... (이름도 안 올라가는 작품에서 열연한 성우분들이 안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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