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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막장’ 막으려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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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오늘 사람 잘못 건드렸어.” “너, 서울역에서 내려라. 안 내리면 죽인다.” 놀랄 일도 별로 없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기 막히게 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이번에는 이른바 ‘지하철 시리즈’다. 지하철에서 20대 청년이 80대로 보이는 노인에게 쌍욕과 함께 폭언을 퍼부었다. 다리를 꼬고 앉지 말라면서 자기 다리를 건드렸다는 게 이 청년을 결사적으로 흥분하게 만든 이유였다. 또 지하철에서 자기 아이를 함부로 만졌다고 할머니 얼굴을 1.5L 페트병으로 폭행한 아이 엄마도 있다.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에 앞서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상대가 세계적인 격투기 선수 표도르나 추성훈이라도 똑같이 그랬을까. 속된 말로 ‘깨갱’했을 거다. 일단 힘없는 노인이란 상대를 대하니까 ‘내가 이렇게 막나가도 어떻게 못하겠지’라는 얄팍하고 단순한 계산이 순간 머리를 스쳤을 테고, 그날 무슨 나쁜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쌓인 스트레스를 만만한 상대에게 일거에 쏟아부은 셈이다. 그러나 ‘동방예의지국’과 같은 서글픈 수식어를 떠나서 노인에게 그 정도 폭언과 폭력을 함부로 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노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더욱 그렇다.

세상은 점점 강하고 독한 것을 선호한다. ‘나는 가수다’를 비롯해 방송국마다 각종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범람하고 있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곧 탈락이다. ‘독설 심사평’도 필수 요소다.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독설의 인기는 여전하다. 내가 강하게 나가지 않으면 나를 우습게 볼 것이고, 그러면 나만 손해를 본다는 강박감이 팽배해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가 오늘날 한국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가 그럴싸하게 들린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혹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무한경쟁 속에서 항상 긴장하며 살고 있다. 적절한 긴장이 발전과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과도한 긴장의 시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적 긴장이란 기대와 현실의 간격에서 비롯된다. 간격이 커질수록 갈등 역시 증폭되며 일탈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정상적인 경쟁에서 뒤처질 때 상처받은 자존심을 보상받기 위해 비정상적 방법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회복이 어려우니까. 욕설을 퍼붓고 위협하는 이런 비정상 행위들이 사실은 정상적인 경쟁에서 탈락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두려움을 반영하는 것일지 모른다. 잘나가거나 힘 있는 사람들은 굳이 힘을 과시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문제는 사회적 긴장이 고조될수록 ‘지하철 폭언·폭력’같이 ‘사회적 막장’을 드러내는 일이 많아질 거란 점이다. 반면 사회적 긴장을 풀어줄 해소 장치들은 너무나 미약하다. 하버드대 강의 교재인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딱딱한 철학서적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공정성에 대한 목마름이 크지만, 경쟁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가고 긴장의 폭과 강도는 끝없이 올라간다.

“가정과 학교에서 인성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좋은 얘기다. 그런데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들어가면 막막해진다. 어느 나라든 인성교육을 강조하지 않은 때가 과연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인권침해 우려와 허위 신상 유포 등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신상 털기’와 같은 일종의 자발적인 사회규제 장치가 보다 더 효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범죄든 비합법 행위든 비용을 크게 지불하게 만들지 않으면 사회 차원의 억제를 할 수 없다. 정부가 못하면 사회에서라도 ‘그들이’ 지불할 비용을 높여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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