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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핵가족화, 예절교육 단절 … 사소한 자극에도 분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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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호 04면

지하철 옆자리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것을 지적한 노인에게 막말과 욕설을 퍼붓는 ‘막말남’ 동영상 속 장면. 이 청년은 60대 남성이 말린 뒤에야 겨우 막말을 멈추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지하철 패륜녀’ ‘지하철 막말남’ 같은 공공 규범·예절의 붕괴 현상은 왜 빈발하는 것인가. 논란이 된 행동이 공개될 때마다 엄청난 사회적 비판이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대 충돌 현상은 오히려 확대재생산되는 경향마저 보인다. 심리학·윤리교육학·범죄학·사회학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원인과 해법을 물어봤다.
 
40∼50대, 자녀 앞에서 부모 흉 자제해야
서울대 박찬구(윤리교육과) 교수는 우선 핵가족화를 지적한다. “예전에는 대가족 속에서 살며 잘못된 언행을 하면 윗사람에게 지적이나 훈육을 받았다. 하지만 핵가족, 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아이들이 떼를 쓰고 함부로 해도 기를 살려준다는 명분 아래 별다른 훈육을 안 한다. 예의와 염치를 가르쳐야 할 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생기는 결과다.”

어른 공경·예절 실종 시대, 전문가들이 말하는 원인·해법

박 교수는 학교교육의 문제도 지적했다. 가정은 물론 학교에서마저 정상적인 인성교육이 이뤄지지 못해 결국 ‘내 맘대로 인간’을 키워낸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제멋대로 행동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직장이나 단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며 “그런 행동이 결국 자신에게 손해라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우리 사회에 잔뜩 쌓여 있는 스트레스도 원인으로 꼽았다. “많은 사람이 취직 불안이나 암울한 미래 전망 등으로 인해 항상 짜증에 차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며 “조금만 건드려도 그야말로 ‘폭발’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남대 이창무(경찰행정학과) 교수도 분노·스트레스로 이어지는 좌절과 사회적 긴장에 주목한다. “좌절과 긴장을 해소해줄 제도나 관습이 덜 발달된 탓에 잠재된 분노와 스트레스가 간혹 극단적인 패륜의 형태로 분출되는 것 같다.”

할머니와 여학생의 난투극이 찍힌 동영상.

서강대 전상진(사회학과) 교수는 서구 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한국 사회의 ‘밀집도’를 거론했다. 그는 “심리적 측면에서 모든 인간은 남으로부터 침해받고 싶지 않는 영역이 있는데 한국 같은 경우는 밀집도가 높기 때문에 언제나 남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며 “그래서 항상 예민해지고 사소한 자극에도 과민반응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박효종(윤리교육과) 교수는 “사회가 개인주의로 흐르면서 연대나 유대가 메말라가고 있다”며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식이 점차 사라지기 때문에 공공규범 붕괴 같은 사회적 모순이 생긴다”고 말했다. “마음속으로 가족이나 이웃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쪽으로 우리 사회가 가고 있다. 젊은 층과 노인층의 갈등처럼 사회 내에 세대 간 갈등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연대의식이 사라지고 있는 반면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흐름이나 노력은 미약하다.”

이나미(심리학) 박사는 유교 전통의 급격한 붕괴를 원인으로 꼽았다. 우리나라가 유럽이나 일본처럼 근대화 과정에서 합리성과 논리성을 키울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채 급속히 발전하면서 모두가 공감할 공동체 규범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불만이 많은 세대가 막말과 과격한 행동을 하게 된다. 욕망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서 노인은 노인대로, 젊은 세대는 그들대로 불만이 많은 게 사실이다. 40~50대 중년층의 책임도 있다. 젊은 세대는 체면을 생각하고 욕 먹지 않기에 매달려야 하는 데 내심 지긋지긋해하던 부모로부터 당당함과 경쟁심을 교육받았다. 그런데 이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자녀들 앞에서 부모 흉을 보는 모습 등을 자주 보이면서 자연스레 자녀들도 노인들을 낮춰보게 됐다.”

다툼 현장 목격한 제3자도 심리적 피해
문제가 되는 사건 현장을 목격하고도 그저 방관하는 주변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전상진 교수는 “자칫 잘못 끼어들었다가 직접적인 피해당사자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많이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 교수는 “나 역시 처음엔 왜 사람들이 망나니를 제지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엉뚱하게 사건에 휘말려 피해를 볼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기도 했다”고 전했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40대 후반의 어느 회사원은 “노인에게 막말을 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젊은이들을 나무랐다가 그들이 반발해 슬며시 물러선 적이 있다”며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과 함께 우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툼의 당사자 못지않게 그런 장면을 지켜보는 목격자 역시 2차적인 피해자임을 말해 준다.

이나미 박사는 ‘방관자 효과’를 얘기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생각인 것이다. 그는 “섣부른 개입으로 인해 나만 큰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공포심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창무 교수는 “공공 도의나 이런 것은 고려하지 않고 점점 자기만 챙기는 측면이 강해지고 있는 걸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해석했다. 박찬구 교수도 “타인의 시비에 끼어들었다가 봉변을 당한다거나 불쾌한 일을 겪을까봐 피하는 것 같다. 사회가 정당한 지적을 하기조차 부담스러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교육 강화하고 제도 정비해야”
전문가들은 해법을 묻는 질문엔 ‘교육 강화’를 가장 강조했다. 박찬구 교수는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비롯한 사회교육을 보다 더 충실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나미 박사도 “윤리교육·배려교육이 너무 부족하다. 학교에서부터 예절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협동심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는 팀 단위 훈련이나 체육활동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개인적으로 왜 문제의 현장에 개입하지 않느냐고만 할 게 아니라 지하철 같은 곳에서는 폭력적인 상황에 즉각 대처할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효종 교수는 사회지도층의 위상정립과 역할 강화를 주문했다. 그는 “점점 커지는 갈등과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영역이 정치권인데 그쪽에서도 분쟁·대립·갈등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사회적 지도층의 도덕적인 위상 확립 역시 절실하다”고 말했다. 전상진 교수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공공규범 파괴 행동을 제재할 수 있는 법제도 정비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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