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 위기 벗어날 길은 긴축뿐 4년간 재정지출 350조원 줄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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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호 22면

지난달 30일 영국 런던의 주요 거리는 ‘삭감 중단’ ‘공정한 연금’ 같은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의 행진으로 소란스러웠다. 영국 정부의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공공 부문 노동조합과 교원노조의 24시간 파업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BBC방송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날 공무원 10만 명 이상이 파업에 참가했고 1만2000개의 공립학교가 휴교를 하거나 수업에 차질을 빚었다. 하지만 영국 정부 대변인은 “파업 참가율이 50%도 되지 않았다”며 “파업의 여파는 미미했다”고 평가절하했다.

40세 영국 재무장관 오즈번의 개혁

파업의 도화선은 조지 오즈번(40·사진) 영국 재무장관이 지난해 10월 의회에 낸 ‘재정지출 재검토보고서’다. 앞으로 4년간 국방·의료·복지·교육 등 각 부처의 예산을 평균 19% 감축하는 게 골자다. 이렇게 해서 줄어드는 재정지출은 4년간 모두 2030억 파운드(약 348조원)에 달한다.

오즈번은 지난 3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긴축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그는 “영국을 국가 부도의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 재정 개혁은 험난한 길이지만 보다 나은 미래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영국 예산청(OBR)은 2014년까지 재정지출 축소의 여파로 공공 부문 일자리가 최대 50만 개나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현지 언론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강력한 긴축정책”이라고 평했다. 오즈번 장관은 2009년 국내총생산(GDP)의 11.4%였던 재정적자를 2015년 1.6%까지 낮추는 게 목표다. 그동안 성역으로 여겨지던 왕실 예산에 대해서도 2015년까지 9%를 감축하기로 했다.

재정 개혁의 초점은 복지 혜택의 축소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고령화가 심각한 상황이다. 노인 인구가 많아지면 자동적으로 복지비 지출이 늘어나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구조다. 이에 따라 오즈번 장관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란 말로 상징되던 복지국가 모델을 사실상 포기했다.

그는 특히 연금 개혁에 집중하고 있다.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연령을 늦추는 것을 포함해 ‘더 내고, 덜 받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영국에서 남성은 65세, 여성은 60세가 되면 국가가 주는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다. 오즈번 장관은 “우선 여성의 연금 개시 연령을 2018년까지 남성과 같은 65세로 끌어올리고, 2020년까지는 남녀 모두 66세로 높이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또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된 공무원연금을 국민연금과 같은 수준으로 맞춰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영국의 공무원과 교사들이 지난달 30일 파업을 선언하고 거리로 뛰쳐나왔던 이유다.

IMF, 재정 개혁 전폭적 지지
오즈번은 세금 정책에선 항목에 따라 감세와 증세를 병행하고 있다. 법인세율은 외국인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2014년까지 단계적으로 5%포인트 내리기로 했다. 지난해 28%였던 법인세율을 올해는 26%로 낮추고, 이후 3년간 매년 1%포인트씩 더 내려 최종적으로 23%가 되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대로 법인세가 내려가면 영국은 선진 7개국(G7) 중 가장 낮은 세율을 적용하는 국가가 된다.

하지만 법인세를 제외한 다른 세금은 전반적으로 올리고 각종 세금 감면 혜택도 없애 나가고 있다. 올 초에는 소비세를 17.5%에서 20%로 인상했으며 은행세·주류세·담배세 등도 잇따라 올렸다. 다만 유류세는 고유가가 지속되는 사정을 감안해 당초 인상계획을 뒤집고 한시적으로 인하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오즈번의 개혁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IMF는 최근 영국 경제에 대한 보고서에서 “‘재정긴축+저금리’의 정책 조합은 적절한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중앙은행은 2009년 5월 이후 2년 넘게 기준금리를 연 0.5%로 유지하고 있다. 존 립스키 IMF 총재 대행은 “긴축으로 재정 건전성을 강화하는 것은 안정적인 국가 경제 운영에 필수적”이라며 “단기적으로 ‘역풍’이 발생하더라도 완화된 통화정책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2009년 영국의 신용등급(AAA)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으나 지난해 오즈번의 재정개혁 보고서가 나오자 다시 ‘안정적’으로 변경했다.

120년 만에 최연소 재무장관
보수당 3선 하원의원인 오즈번은 지난해 5월 데이비드 캐머런(45) 총리가 취임하면서 재무장관에 임명됐다. 1971년 런던에서 태어나 당시 39세 생일도 지나지 않았던 그는 120년 만에 최연소 영국 재무장관으로 화제가 됐다. 종전 최연소 기록은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인 랜돌프 처칠이었다. 그만큼 오즈번은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개혁정책을 밀고 나가고 있다. 그의 차분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추진력은 80년대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마거릿 대처 총리와 비교될 정도다.

캐머런 총리도 오즈번에게 확고한 신임과 지지를 보내며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고 있다. BBC는 “캐머런과 오즈번의 관계는 노동당 정부 시절 토니 블레어 총리와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처럼 유력한 ‘정치적 콤비’”라고 평했다. 영국에서 총리는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내각의 실질적인 2인자인 재무장관은 11번지의 관저에서 살며 긴밀하게 의사소통을 한다. 다섯 살 차이인 캐머런과 오즈번은 자녀들의 세례식에서 서로 대부를 섰을 정도로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영국 안에선 오즈번의 개혁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다. 경제성장률은 저조(올해 1.5% 전망)하고 고용 사정이 악화(2~4월 실업수당 청구 2년 만에 최고)하면서 야당과 노조는 물론 일부 지식인도 오즈번을 비판하고 있다. 골드스미스대의 리처드 그레이슨 교수 등 경제학자 52명은 최근 “지나친 긴축은 영국 경제에 득보다 실이 많다. ‘플랜B(대안)’를 마련해야 한다”는 공개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오즈번 장관은 “개혁에 후퇴는 없다”며 일축했다. 그는 “우리의 목표는 신용이 없는 곳에 신용을 심고, 안정이 없는 곳에 안정을 심는 것”이라며 “최근 경제지표는 보기에 따라선 긍정적인 측면도 많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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