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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금융사 필요한가 … “규모 크면 위험도 커” vs “규제 지나치면 부작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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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23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국금융연구원 창립 20주년 국제회의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디미트리오스 스모코스 옥스퍼드대 교수, 차비에르 프릭사스 폼페우파브라대 교수, 이토 다카토시 도쿄대 교수,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로버트 먼델 컬럼비아대 교수, 김태준 한국금융연구원 원장, 랜들 크로즈너 시카고대 교수, 박성욱 금융연구원 박사. 뒷줄 왼쪽부터 임형준 금융연구원 박사, 이헌석 금융위원회 국제협력관, 더글러스 게일 뉴욕대 교수,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 함준호 연세대 교수, 신현송 프린스턴대 교수. [김도훈 기자]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글로벌 금융위기가 남긴 문제이자 숙제다. 위기 이후 해답을 찾는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23일 한국금융연구원은 창립 20주년을 맞아 이를 모색하는 국제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주제는 ‘규제 개혁과 금융의 미래’. 중앙일보와 금융위원회 후원으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렸다.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 온 학자들이 국내 전문가들과 토론을 통해 의견을 나눴다.

글=한애란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더글러스 게일 교수, 랜들 크로즈너 교수

덩치 큰 금융회사는 금융위기를 불러온 주범인가.

 이날 콘퍼런스에선 대형 금융회사 규제를 둘러싸고 상반된 의견이 나왔다. 더글러스 게일(오른쪽 사진) 뉴욕대 교수는 “대형 금융회사는 없애는 게 낫다”는 주장을 내놨다. 이에 비해 랜들 크로즈너(왼쪽 사진) 시카고대 교수는 “금융회사 규모를 줄이면 오히려 위험이 커진다”는 입장이다. 두 교수는 시종 팽팽히 맞섰다.

 게일 교수는 “씨티나 JP모건체이스 같은 규모의 대형 금융회사는 여러 가지 문제를 초래해 또다시 위기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대마불사’ 경향은 도덕적 해이를 불러온다. 한 회사의 손실이 다른 금융회사까지 위험하게 만드는 전염성도 지녔다. 이런 이유로 그는 “대형 금융회사를 작은 은행들로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그의 대안은 작고 특화된 은행들로 구성된 ‘병렬은행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지급·결제 기능만 갖는 소형 은행(내로뱅크)을 많이 만들어 내자는 것이다. 그는 “이런 은행은 위험한 거래를 하지 않고 투명하기 때문에 도산할 염려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크로즈너 교수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간 분리가 느슨해진 게 금융위기의 원인이란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2006~2009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이사를 지낸 금융 규제 전문가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베어스턴스·메릴린치·리먼브러더스 등은 상업은행지주회사에 속해 있지 않은 투자은행이었다. 인디맥·와코비아·워싱턴뮤추얼 등 상업은행이 금융위기로 몰락한 건 모기지 때문이었다. 모기지는 전통적인 상업은행의 영역이지 투자은행과는 별개다.

 크로즈너 교수는 금융회사 규모를 제한하고,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는 게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거라고 본다. 투자 기능이 위축된 은행은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전보다 더 다양한 금융회사와 시장을 이용해야 한다. 따라서 은행 간 상호 연계성은 점점 더 커진다. 이는 금융회사 안정성에 위협요인이 된다는 게 크로즈너 교수의 시각이다. 그는 “길고 복잡한 자금 조달 구조는 기존 ‘뱅크런’보다 훨씬 강력한 ‘펀딩런’을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 금융회사가 흔들리면 다른 금융회사들까지 연이어 자금줄이 막히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크리즈너 교수는 “자본 요건을 강화하는 금융 규제 개혁은 필요하지만 너무 한쪽 방향으로 치우치면 오히려 시장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신현송 교수 ‘한국 유동성 위기’ 경고

“유럽계 은행들이 자금 회수에 나선다면 한국도 외화 유동성 경색에 시달릴 수 있다.”

 신현송(사진)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이같이 경고했다. “유럽계 자금은 한국뿐 아니라 글로벌 자금 흐름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신 교수는 지난해 청와대 국제경제보좌관을 지냈다.

 그는 유럽은행의 영향력을 보여 주는 근거로 국제결제은행(BIS) 통계를 활용했다. 이 통계에 따르면 그리스·아일랜드·스페인 같은 유럽 국가는 물론 한국도 50%가량의 해외 자금을 유럽계 은행에서 조달하고 있다. 그는 “보통 한국에 투자된 글로벌 자금은 미국과 일본계 자금이 대부분일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실제로는 유럽계 자금 비중이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 그리스의 재정위기 여파로 유럽 은행들이 자금을 거둬들인다면 한국 금융시장도 큰 영향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그는 “금융시장의 상호 연관성 때문에 유럽은행의 자금 회수는 달러가치 급등을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 교수에 따르면 영국·독일·프랑스·스위스 등 서유럽 은행들은 금융위기 이후 미국 자금을 대거 끌어들였다. 넘치는 달러 자금을 싸게 조달해 글로벌 은행의 창구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이제 유럽은행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국내 은행들은 금융위기 이후 유럽 은행으로부터 차입을 크게 늘려 왔다.

 신 교수는 “1994년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94년은 미국 연준이 3%였던 금리를 6%로 대폭 인상한 해다. 당시 글로벌 금융시장이 자금 회수에 나서면서 국내 금융회사들이 타격을 받았다. 그는 “현재 글로벌 금융구조를 감안할 때 94년과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훨씬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를 위해 “금융안정분담금(은행세) 제도 같은 거시건전성 규제 도입이 국제적으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이 8월 도입할 예정인 외환건전성부담금이 이러한 거시건전성 정책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외화건전성부담금은 금융 중재의 핵심 기능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은행의 부채 거품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토 교수 ‘다국적 금융사 부실 어떻게’

“금융위기 이후 여러 규제개혁 조치가 나왔지만 중요한 한 가지가 여전히 빠져 있다.”

 첫 번째 주제 발표자로 나선 이토 다카토시(伊藤隆敏·사진) 도쿄대 교수는 이같이 지적했다. 이토 교수는 국제통화기금(IMF) 선임 자문위원을 역임한 일본의 대표적인 경제관료 출신 국제통 학자다. 그가 말한 한 가지는 바로 ‘다국적 부실 금융회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국제적 논의다.

 그는 리먼브러더스 사태를 예로 들며 주장을 펼쳤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본사가 미국에서 파산 신청을 하면서 일본과 영국 지사도 각국에서 파산 신청을 했다. 하지만 세 나라의 파산법이 제각각이다 보니 처리 절차는 복잡하게 꼬여 갔다. 일례로 도쿄지사에서는 고객이 담보로 맡겼던 자산을 조금이라도 돌려주려고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이미 다른 나라에 있는 자산이 법원 판결에 의해 동결돼 있어 되돌려 받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토 교수는 “이 과정에서 많은 아시아 고객은 물론 미국의 헤지펀드들이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는 ‘도미노 현상’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따라서 “다국적 대형 금융회사에 대한 각국의 부실 처리 절차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앞으로 국제적인 논의를 통해 대형 부실 금융회사에 대한 공통된 처리 방식을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는 “물론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면서도 “하지만 시스템 안정성을 유지하고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이토 교수는 “단기, 예를 들어 일주일 이하 거래라면 상대방을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이 처리 절차에 포함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주주와 경영진에 대해서는 “은행이 정리된다면 주주는 아무 보상도 못 받고, 경영진도 퇴직금 없이 해고되는 건 당연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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