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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말 ‘2차 양적완화’ 종료 돈 더 풀자니 물가상승 걱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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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호 22면

출구는 멀어지고 고민은 깊어졌다. 벤 버냉키(58·사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얘기다. 그는 22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마치고 난 뒤 기자들 앞에 설 예정이다. 지난 4월 말에 이어 FRB 97년 역사에서 두 번째 기자회견이다.

22일 두 번째 기자회견 앞둔 버냉키 FRB 의장의 딜레마

하지만 두 달 만에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잠시 좋아지는 듯하던 미국 경제는 다시 비틀거리고, 유럽 경제는 그리스 국가부도 위기라는 ‘중병’으로 신음하고 있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중국도 심각한 인플레로 고민하고 있고 3위인 일본은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버냉키로선 출구전략의 ‘출’자도 꺼내보지 못하고 추가 부양책을 고민해야 할 처지다. 2008년 금융위기를 예측해 ‘닥터 둠’으로 불리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2013년께 세계 경제에 대형 악재가 한꺼번에 닥치는 퍼펙트 스톰(초강력 폭풍)을 맞게 될 것”이란 비관적 전망도 내놨다.

더구나 6월 말이란 시한이 다가오고 있다. FRB가 6000억 달러를 풀어 미 국채를 사들이는 ‘2차 양적완화’의 종료 시점이다. 사람으로 치면 중환자의 입에 물려준 산소호흡기를 떼기로 한 날이다. 문제는 산소 호흡기를 뗀 이후 건강 상태에 대해 자신이 없다는 점이다.

버냉키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미국 고용 사정의 악화다.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 중앙은행이 물가안정을 최우선 정책 목표로 하는 것과 달리 FRB는 ‘물가안정과 최대 고용’이란 두 가지 사명을 동시에 추구하도록 법률에 명시돼 있다. 그런데 이달 초 미 노동부가 발표한 지난달 실업률은 9.1%로 올 들어 가장 높아졌다. 미국의 실업률은 지난해 11월 9.8%에서 지난 3월에는 8.8%까지 떨어지며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줬지만 이후 상승세로 돌아선 것이다. 지난달 미국에서 새로 생긴 일자리(비농업 부문)도 5만4000개에 그쳐 예상치(16만5000개)를 크게 밑돌았다. 미 경제 성장률은 1분기에 1.8%(전 분기 대비 연율)로 지난해 4분기(3.1%)에 비해 크게 낮아졌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선 ‘소프트패치(일시적 경기둔화)’냐, ‘더블딥(이중 침체)’이냐 하는 논란이 커지고 있다.
 
그리스 사태는 19일이 고비
대서양 건너 유럽의 사정은 더욱 좋지 않다. 그리스 사태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처럼 얽히고설켜 좀처럼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 정부와 야당,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의 리더인 독일과 프랑스, 유럽중앙은행(ECB)·국제통화기금(IMF)까지 뒤엉켜 있다. 이런 와중에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그리스의 국가신용등급을 ‘B’에서 ‘CCC’로 3단계 강등했다.

그리스 사태는 일단 19일 유로존 재무장관회의가 고비다. 올리 렌 유럽연합(EU) 경제·통화 담당 집행위원(장관급)은 “19일 회의에서 추가 구제금융 지원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그리스의 디폴트를 피할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말했다. EU와 IMF는 다음 달 초 그리스에 공동 구제금융 5차분(120억 유로)을 지원할 계획이지만 IMF는 “EU의 추가 지원 프로그램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만일 5차 구제금융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리스는 다음 달 15일 만기가 돌아오는 24억 유로의 국채를 갚지 못하고 부도를 낼 수밖에 없다.

다행히 강경한 입장이었던 독일이 한발 물러서며 당장 ‘폭탄’이 터지는 상황은 피해가는 분위기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17일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그리스의 채무조정에) 민간 투자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란다. 민간의 참여를 강제하는 법적 근거는 아직 없다”고 말했다. 그전까지 메르켈 총리는 “민간 투자자도 손실의 일부를 부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ECB와 프랑스는 “민간을 강제로 참여시키면 사실상 디폴트로 해석돼 세계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질 수 있다”고 맞서왔다.

그리스 사태는 버냉키로서도 ‘바다 건너 불구경’이나 할 입장이 아니다. 그리스가 결국 디폴트를 선언한다면 미국 금융시장도 충격을 피하기 어렵다.
 
FT “물가 상승이 FRB 손목 묶었다”
그렇다고 버냉키가 돈을 더 푸는 ‘3차 양적완화’를 채택하기도 쉽지 않다. 돈을 풀면 풀수록 돈값은 떨어지고 물건값은 오르게 마련이다. 버냉키가 1, 2차 양적완화를 결정했을 때는 인플레보다는 디플레를 걱정하던 시기였다. 그만큼 돈을 많이 푸는 데 따른 부담이 적었다. 하지만 올 들어 국제 유가와 곡물가 상승에서 촉발된 인플레 공포는 일본을 제외한 거의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지난달 3.6%(전년 동기 대비)로 2년7개월 만에 가장 높았다. 지난달 CPI는 전월 대비로도 0.2% 올라 전문가들의 예상치(0.1%)를 웃돌았다. 만일 물가만 생각한다면 돈을 더 풀기보다는 오히려 거둬들여야 한다. 실제로 FRB보다 물가안정을 훨씬 중시하는 ECB는 그리스 사태에도 불구하고 지난 4월 금리인상을 결정했으며 조만간 추가 인상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22일 기자회견에서 버냉키가 어떤 카드를 들고 나올지 전 세계 금융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CPI 상승이 FRB의 손목을 묶었다”며 “추가로 통화정책을 완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로이터통신은 버냉키의 과거 연설문을 토대로 다양한 선택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첫째는 인플레 우려에도 불구하고 추가로 국채를 사들이는 3차 양적완화에 나서는 것이다. 둘째는 FOMC 성명서의 어조를 지금보다 더 완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투자자들은 FRB가 출구전략을 선택하는 시점이 예상보다 더 늦어질 것이란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다음은 물가상승 억제 목표치를 도입하되 목표를 높게 잡는 것이다. 현재 연준은 내부적으로 2%를 물가상승 억제 목표로 설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외부에 공표한 적은 한번도 없다. 만일 버냉키가 물가상승 억제 목표로 2%보다 높은 숫자를 발표한다면 통화정책이 그만큼 완화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 2~3년 만기 국채 수익률의 억제 목표치를 설정하는 방법도 있다. 미국 시장에선 10년 만기 국채를 기준으로 삼아 왔지만 만기가 비교적 짧은 국채로 기준을 변경해 FRB가 직접 시장에 개입하는 방식이다. ‘채권왕’으로 불리는 빌 그로스 핌코 회장도 이런 가능성을 높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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