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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명령 때문에 싸웠지만 내 젊음은 충분히 보상받은 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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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호 08면

1950년 12월 함경남도 장진호 인근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치른 미군 해병대 장병들이 눈길에서 쉬고 있다. 해병 5연대 소속 통신병이던 윌리엄 우드(아래 사진)도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나는 1948년 7월, 16세 때 미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미 버지니아주 포트머스에서 홀어머니와 살던 나는 당시 동네 말썽꾸러기가 돼가고 있었다. 2차 대전의 후유증인 암울한 분위기 속에 ‘최고가 될 수 있다’는 해병대의 선전 문구에 마음이 끌렸다. 어머니도 흔쾌히 동의했다. 13주간의 해병대 훈련에서 나는 통신병 교육을 이수했다. 그리고 미 동부 해안 지역에 이병으로 배치됐다.

내가 겪은 6·25<하> 미 해병대로 참전한 윌리엄 우드

1년여 세월이 흐른 1950년 6월 25일. 한국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나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7월 말 기차를 타고 서부로 이동했다. 샌디에이고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병참기지 역할을 하던 고베가 1차 목적지였다. 일개 사병인 내가 미국 본토와 지중해에서 1만9000명의 미 해병들이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 수가 없었다.

9월 14일 군함을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 땅을 밟은 날은 9월 15일. 나는 이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바로 내 어머니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이 인천이란 것은 뒤늦게 알았다.

나보다 앞서 해병 연대는 오전 8시 월미도에 상륙했다. 내가 속한 5연대는 조류 때문에 상륙이 쉽지 않았다. 오후 5시30분 인천의 맨 오른쪽 해안에 다다랐다. 공장 건물들이 보였다. 북한군은 전혀 준비돼 있지 않았다. 크게 놀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숫자도 적었다. 소련제 T-34 탱크 몇 대가 보일 뿐이었다. 5연대의 모든 무기들이 화력을 풀었다. 미 해군 전투기도 날았다. 교전은 있었지만 내가 TV에서 본 2차 대전의 격렬한 전투 모습과 비교하면 싱거울 정도였다. 인천 해안가에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체를 봤다. 머리에 총상을 입은 북한군 병사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목표는 분명했다. ‘서울 탈환.’ 9월 18일 저녁, 서울로 향하는 도로상에서 북한군과 조우했다. 그들은 탱크를 앞세워 이동 중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둠 때문인지 우리의 존재를 제대로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섬멸했다.

그러나 서울로 향하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영등포와 마포의 큰 교차로에서 본격 시가지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는 낮 전투를 선호했다. 강력한 화력을 제대로 쏟아붓길 원했다. 반면 북한군은 밤에 움직였다. 어둠을 틈타 강력한 반격을 시도해 왔다. 다음 날 아침, 마포 교차로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도로 곳곳에 북한군이 숨진 채 쓰러져 있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우리 병력도 적지 않은 피해를 봤다. 다리에 총상을 입고 고통스러워 하던 전우를 그날 이후론 볼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서울을 탈환했다. 한국 대통령 이승만까지 참석한 커다란 서울 수복 행사가 진행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다시 인천으로 돌아갔다. 10월 중순 전열을 정비한 뒤 이번엔 뱃길로 원산으로 향했다. 북한이 설치해 놓은 기뢰를 일일이 제거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적지 않은 시간과 희생이 뒤따랐다. 바짝 긴장한 채 원산에 접근했다. 그러나 도착해보니 이미 한국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위문 공연차 원산을 방문한 코미디언 밥 호프는 이를 두고 “미국 해병대가 한국군만도 못하냐”고 웃으며 비꼬았다.

나는 “아, 전쟁은 끝났구나. 곧 집에 갈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하루 이틀 뒤 북한군이 기습작전을 감행해 왔다. 눈앞에서 동료 3명이 죽었다. 결코 전쟁이 끝난 게 아니었음을 이보다 실감할 순 없었다.

원산에서 함흥으로 이동하며 곳곳에서 매복한 북한군과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졌다. 동료의 부상과 죽음은 이제 늘 감수해야 할 일이 돼 버렸다. 날씨가 추워졌다. 영하 30도가 넘는 강추위에 강물까지 꽁꽁 얼어붙었다. 군용 식량 C-레이션도 자동차 라디에이터 위에서 15분가량 녹여야 먹을 만했다. 삽으로는 도저히 진지를 구축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이너마이트까지 이용했다.

11월 초 흥남과 장진호 중간에 자리한 수동리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언덕 너머에 있던 엄청난 적 병력이 밀고 내려왔다. 적은 어처구니없게도 길을 사이에 두고 두 줄로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모든 화력을 그들에게 집중시켰다. 다음 날 시체는 길거리를 가득 메웠고, 우리는 그제야 이들이 중공군이었음을 알았다.

나는 중공군 시체 더미에 다가갔다. 당시 최고 인기였던 러시아제 장총을 기념품으로 갖기 위해서였다. 총을 하나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그러나 러시아 총이 아니었다. 미 코네티컷주 하트포드라는 원산지 표시가 분명한 미제 총이었다. 중국 내전 중 유입된 미국 총이 한국전쟁까지 그 수명을 이어간 것이었다. 총의 탄창을 빼보았다. 첫 번째 총알 자리에 소제(掃除)용 조각천이 들어 있었다. 총알이 제대로 발사될 리 만무했다. 11월 25일은 미국의 추수감사절이었다. 해병 5연대 800명은 도로변에 세워둔 트럭 뒤쪽에서 특별히 공수된 칠면조 고기를 즐겼다.

며칠 후 장진호 북쪽 유담리에서 미군은 크게 패했다. 미군은 해병 7연대와 5연대가 서로 유기적으로 받쳐주는 전술을 애용했다. 그러나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상황은 급변했다.

12월 7일 우리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날은 마침 9년 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날이기도 했다. 흥남을 거쳐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나는 심한 독감에 걸렸다. 그러나 내가 받을 수 있는 치료는 텐트 안에 다소 오랫동안 눕는 것, 그리고 아스피린과 물뿐이었다. 다행히 젊음이 나를 살렸다. 그즈음 어머니로부터 소포가 도착했다. 생선을 넣은 빵은 다 상한 상태였지만 빵 밑에 살짝 넣어 준 위스키 한 병은 온전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다시 북을 향해 움직인 때는 바로 내 생일과 같은 51년 2월 21일이었다. 우리는 다시 안동을 거쳐 원주로 올라갔다. 북한군의 게릴라 작전을 막는 게 임무였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과의 전투는 없었다.

51년 4월 나에게 귀국 명령이 떨어졌다.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소지품 하나 챙기지 않고 부대에 다 버려둔 채 그저 몸만 빠져 나와 지프를 탔다. 횡성 근처에서 화물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 왔다. 긴 잠 속에 빠진 상태에서 나는 바다를 건넜다. 고베 군기지 창고에서 맡겨뒀던 세일러 백을 찾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버지니아로, 결국 나는 살아서 고향에 돌아왔다.

52년 나는 해병대를 떠났다. 그리고 공부를 다시 시작해 대학에 들어갔다. 아메리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30년간 연방기관인 증권거래위원회에서 일했다.

92년 한국전쟁 참전용사 방문 행사 때 한국을 방문했다. 전쟁통의 한국을 떠난 지 딱 40년 만이었다. 40년 전 내가 총을 들고 싸우던 남산 어귀에 있는 호텔에 묵었다. 아름다운 경치, 자동차로 꽉 막힌 시내, 경이로울 뿐이었다.

왜 남의 나라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느냐고? 솔직히 말한다. 나는 해병대에서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배웠다. 18세의 나에겐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민주주의, 동맹 이런 것은 알지 못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한국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나서 느끼는 게 있었다. 내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나라가 한국이란 게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나는 내 젊은 날을 보상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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