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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37) 25시(時)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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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맨발의 청춘’(1964)에서 신성일이 면도하는 장면. 잘 발달한 삼각근이 돋보인다. 왼쪽은 트위스트 김. 신성일은 이 영화가 성공하면서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뛰어다니게 됐다.


한 번, 두 번, 세 번…. 청춘영화 세례를 받은 관객들은 영화 ‘맨발의 청춘’에 열광했다. 영화의 시스템도 달라졌다. 방우영 당시 조선일보 전무가 아카데미극장을 맡았을 때 극장이 지고 있는 빚만 1억원이었다. 1964년에 1억원은 엄청난 돈이었다.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2008년 펴낸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맨발의 청춘’이 히트해서 1억원을 갚았다. 신성일·엄앵란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고 썼다. 아카데미극장은 이후로도 나와 엄앵란의 영화를 계속 상영해 굉장한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평론가들은 ‘맨발의 청춘’이 대한민국에 스타시스템을 탄생시킨 작품이라고 평한다. 그렇게 볼 수 있다. 그 전까진 배우의 이름을 내걸어 흥행몰이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맨발의 청춘’을 계기로 나와 엄앵란은 흥행 보증수표가 됐다. 영화 제작사들은 나와 엄앵란을 출연시키느냐, 못하느냐에 사활을 걸었다. 스타 시스템의 시작이었다.

 당시 영화계를 좌지우지하는 세력은 지방업자와 극장주였다. 필름이 매우 귀한 시대였다. 서울의 극장 하나, 부산·광주 등 지방 5개 권역의 각 업자가 많아야 10개 미만의 필름을 입도선매했다. 지방업자들이 필름을 미리 사가는 기준은 몇 가지가 있었다. 나와 엄앵란의 출연 여부, 시나리오, 제목 등이었다. 제작사 측은 지방업자들의 입맛에 맞춰 작품을 만들었다.

 서울에도 영화 필름(20분 단위 5~6개 롤)은 하나밖에 없었다. 반면 나와 엄앵란이 나오는 작품을 걸고 싶어하는 극장은 많았다. 서울 중심가 극장에서 상영이 끝나면 오토바이가 필름 한 롤을 들고 영등포 등 다른 지역 극장으로 달렸다. 20~30분 간격으로 상영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극장을 돌다 보니 사고도 많이 났다. 필름이 도착하지 않아 상영이 지연되는 경우도 있었다. 제작자는 지방업자와 극장주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제작비를 자체 충당할 수 있는 영화사는 거의 없었고, 지방업자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한양영화사에서 일하던 신봉승 작가에 따르면 ‘맨발에 청춘’ 이후 군소제작사들은 죄다 ‘청춘’이 들어가는 영화에 달려들었다. 작은 제작사일수록 나와 엄앵란이 더욱 필요했다. 거기 가담한 사람이 명동에서 동양양복점을 운영하던 이종벽 사장이었다. 이 사장은 동양영화사를 설립해 나와 엄앵란 주연의 영화를 제법 많이 만들었다.

 할리우드는 스타 시스템의 원조였다. 클라크 게이블·비비안 리 주연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로버트 테일러·데보라 카 주연의 ‘쿼바디스’(1951), 제임스 딘·나탈리 우드 주연의 ‘이유 없는 반항’(1955), 워렌 비티·나탈리 우드 주연의 ‘초원의 빛’(1961) 등은 스타를 전면에 앞세운 영화였다. 이와 달리 보수적 경향이 강한 유럽은 철저한 프로듀서 시스템이었다.

 1년 제작 편수는 약 150편. 관객층이 완전히 변했다. 그 전까진 ‘고무신 관객’이라 불린 중년여성을 겨냥한 멜로영화가 대세였지만 그 자리를 청춘영화가 차지하게 됐다. 나는 잠잘 시간이 없었다. 24시로는 부족했다. 24시를 4등분해 한 작품에 6시간씩 할당하는 스케줄로 살았다. 새벽이면 차에서, 라이온스호텔 사우나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25시(時)의 삶. 하지만 그보다 더 행복할 순 없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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