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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에겐 교양물, 대학생에겐 불온 서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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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호 09면

젊은 시절의 작가 조정래의 모습. [중앙포토]

1980년대 막바지 계간문예지 ‘문예중앙’이 일간지 문학 담당 기자와 문학평론가 40여 명을 참여케 하여 80년대 10년간 소설과 시 부문의 문제작과 문제작가를 선정토록 하는 특집을 마련한 일이 있었다. 그때 소설부문 문제작 1위로 선정된 작품이 ‘태백산맥’, 문제작가 1위로 선정된 문인이 조정래였다. 그 무렵 ‘태백산맥’은 아직 제3부가 연재 중이었고, 그로부터 1년여 지난 뒤 제4부까지 완결되어 89년 말 총 1만6000여 장 분량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전10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83년 9월부터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한 후 6년3개월 만의 일이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14> 조정래 ‘태백산맥’의 수난

작품이 써진 시기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제 5공화국이 출범한 지 2년쯤 지난 후에 시작해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지 2년쯤 지난 뒤에 끝난 셈이다.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면서부터 5공 초기까지의 강압적인 통치 행태를 감안하면 공산주의자들의 빨치산 활동을 실감 있게 그린 ‘태백산맥’과 같은 소설이 어떻게 그 시기에 자유롭게 써질 수 있었는지 신기한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정국이 다소 안정돼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83년에 접어들면서 정부는 문화예술계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문학 분야에 대해서는 ‘문인들의 견문을 넓히고 작품 취재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200명 가까운 문인에게 해외여행의 기회를 제공하는가 하면 문예지·동인지의 원고료 지원을 대폭 늘리는 등 각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경비는 모두 문예진흥기금으로 충당됐다.

꼭 그 때문만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태백산맥’은 제1부가 끝난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공안당국의 이렇다 할 눈총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1부가 끝나고 제2부가 시작된 87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밤 조정래에게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경고 혹은 협박전화가 걸려오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일선 경찰서의 형사가 찾아와 쓸데없는 ‘안부’를 물어 작가를 긴장케 하곤 했다. 주변의 충고성 경고도 잇따랐다. 특히 작가를 힘겹게 한 것은 취재를 위해 전남 벌교 등 작품 속의 현장을 찾아가 관계자들에게 증언을 요청하면 대개는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더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현행법을 들먹인다든지 작품 연재에 영향을 주는 직접적인 압박은 없었다.

소설 ‘태백산맥’의 사상성이 처음 공개적으로 도마에 오른 것은 뜻밖에도 문단이었다. 원로 소설가 김동리가 한 문학 강연에서 “민중문학의 사상성은 본질적으로 불온하다”면서 ‘태백산맥’을 잠깐 언급한 데 뒤이어 원로 시인 서정주는 사사로운 문인 모임에서 ‘태백산맥’은 전형적인 ‘빨갱이 소설’이라면서 “이런 빨갱이 소설이 거침없이 읽히는 이 사회가 개탄스럽다”고 말한 것이다. 특히 서정주의 ‘빨갱이 소설’이라는 표현은 ‘태백산맥’을 즐겨 읽던 많은 독자를 자극했다. 따지고 보면 열렬한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빨치산 투쟁이 전편을 관통하는 소설 ‘태백산맥’을 ‘빨갱이 소설’로 지칭했다 해서 큰 잘못은 아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빨갱이 소설’이라는 표현의 저변에는 오랜 세월 한국 사회를 옥죄어온 반공 이데올로기가 깊숙이 깔려 있음은 누구나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공안당국이 ‘태백산맥’의 국가보안법상 이적성 여부를 은밀하게 내사하기 시작한 것은 연재가 끝나고 전 10권으로 완간된 89년 말의 일이었다. 완간 후 보인 독자들의 폭발적 반응을 고려했음인지 처음에는 수사에 적극성을 띠지 않은 말 그대로의 ‘내사’ 수준이었으나 이듬해인 90년 5월 대검찰청이 소설 ‘태백산맥’을 ‘이적 표현물’로 분류한다고 공표해 수사에 좀 더 적극성을 띨 것임을 예고했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대중적 인기는 갈수록 치솟았고, 각종 매체는 여러 방식의 조사 통계를 통해 ‘태백산맥’을 ‘8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소설’로 꼽고 있었다. 무엇보다 노태우 정권 말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므로 문학작품을 사법 처리의 대상으로 삼았다가는 정치권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대검은 92년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내사를 종결한다고 발표했다.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국가보안법상의 이적 표현물과 적에 대한 고무찬양에 저촉되는지를 내사한 결과 작가에 대한 의법 조치나 책의 판금을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한데 단서로 붙인 문구가 희한했다. ‘일반 독자들이 교양으로 읽는 경우에는 무관하지만, 학생이나 노동자들이 읽으면 불온서적 소지 및 탐독으로 의법 조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검찰 당국의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때 이 발표를 접한 조정래는 이렇게 말했다. “안방에서 어머니가 읽으면 교양물이고, 건넌방에서 대학생 아들이 읽으면 이적 표현물이란 말인가?”

소설 ‘태백산맥’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뒤이어 여러 개의 반공 우익단체들이 ‘작가의 사상이 불온하다’며 검찰에 고발하는가 하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양자도 이승만의 명예를 훼손했다 하여 검찰에 고발했다. 조정래는 치안본부 대공수사실에까지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으나 그 이후에는 수사기관의 잇따른 출두 요구를 번번이 거부하는 공방이 한동안 되풀이되기도 했다.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가 되는 벌교는 세습 봉건지주와 일제의 수탈, 그리고 여순반란사건과 6·25전쟁 등 고난의 한국 현대사가 점철된 곳이다. 조정래는 이곳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고, 그래서 ‘태백산맥’은 그의 숙명적인 작업이었는지도 모른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우리 문학이 여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해방 40년의 기간이 필요했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은 이 작품을 서정주가 표현한 바 ‘빨갱이 소설’의 울타리에 가두려 하고 있고, 그것은 남북 분단의 현실 속에서 최소한의 타당한 근거도 지닌다. 그것이 소설 ‘태백산맥’이 태생적으로 지닌 비극이다. ‘태백산맥’이 오로지 순수한 문학작품으로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 것 같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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