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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봤습니다] 박형수 기자가 본 농어촌 자율학교, 경북 안동 풍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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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김민애(15) 양은 경북 안동 풍산고 신입생이다. 올 3월 민애는 서울에서 혼자 안동으로 내려왔다. 집에 가는 건 한 달에 한 번꼴. 고속버스로 3시간을 달려 가족들을 만난다. 민애는 중학교 시절 전교 5위권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특목고 진학을 꿈꾸다 중3 막판에 풍산고를 택했다. 최근 민애처럼 서울·경기도 등 대도시 상위권 중학생들이 농어촌 지역 자율학교로 찾아들고 있다. 교육이라면 너도나도 서울로, 강남으로 향하는 요즘 우수 중학생들의 발걸음을 되돌린 자율학교의 저력이 궁금했다. 19일 풍산고를 찾아 민애와 하루를 보냈다.

글=박형수 기자
사진=김진원 기자

자율학교인 풍산고(경북 안동)는 전교생 기숙사 생활, 수준별 수업 등으로 전국에서 우수한 중학생들이 몰려들고 있다. 큰 사진은 방과후 수학 특강을 듣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김진원 기자]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 교사들 관심도 각별

서울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해 고속도로를 쉼없이 달려 낮12시가 넘어서야 풍산고에 도착했다. 윤영동 교장이 반갑게 맞았다. 잔디가 곱게 입혀진 운동장과 리모델링한 지 얼마 안 된 학교 외관이 산뜻했다. 학교 주변은 학원은커녕 PC방이나 오락실도 하나 없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었다. 윤 교장은 “주변이 온통 논밭이고 구경거리라고는 15분 정도 떨어진 안동 하회마을 정도”라며 “학생들이 재밌게 놀 만한 곳은 운동장도 있고 컴퓨터실도 있는 학교뿐”이라고 말했다.

교장실 앞에는 전교생의 증명사진이 학년·반별로 정리돼 나란히 전시돼 있었다. 사진 옆에는 학생의 이름과 출신 중학교, 진로계획, 장래희망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학생들이 집처럼 생활하는 공간인 만큼 교사들도 부모의 마음으로 학생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겠다는 취지로 정리해 둔 것이다. 윤 교장은 “전교생의 이름은 물론 현재 성적이나 어지간한 고민거리까지 꿰뚫고 있다”며 웃었다.

기자는 5교시부터 민애와 동행했다. 점심을 먹고 잠이 쏟아질 시간이건만 수업 시간에 조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교사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답하는 등 활발한 분위기였다. 민애는 “아이들끼리 ‘다들 열심히 하자’는 분위기라 졸면 서로 깨워 준다”고 귀띔했다. “서울의 인문계 고교로 진학한 친구한테 들으니 학교에서 노는 아이들이 70%라고 하더라고요. 여기서는 공부하는 게 너무 당연하니까 경쟁심도 생겨 정신 차리고 공부할 수밖에 없어요.”

6교시 수업이 끝난 뒤 학생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주 3회 이뤄지는 ‘1인 1특기’ 시간이다. 전교생이 검도·태권도·클래식기타·요가·헬스·과학실험 중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배운다. 외부 강사를 초빙해 전문적인 교육이 이뤄진다. 윤 교장은 “검도나 태권도의 경우 2년 동안 배우면 심사를 받아 단증도 딸 수 있다”고 알려 줬다. 과학실험반인 민애는 이날 특정 온도에 따라 변색되는 시온 잉크를 활용해 ‘카멜레온 열쇠 고리 만들기’를 했다. 민애는 “수학·과학 과목이 약한 편이라 이 수업을 신청했다”며 “정규 수업 시간에 이론 위주로 배웠던 것을 간단한 실험으로 익힐 수 있어 재미도 있고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요일마다 바꿔가며 수준별 수업, 인강 듣기도

민애는 학교의 최대 장점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민애가 들려준 하루 일과는 이랬다. 오전 5시30분 기상, 씻고 운동장 2바퀴 돌고 식사까지 마치면 6시40분이다. 이때부터 8시까지 자율학습을 하다 수업에 들어간다. 방과후 일정은 오후 7시부터다. 요일에 따라 영어·수학·논술 수업이 수준별로 편성돼 있다. 논술은 서울에서 전문 강사를 초빙해 진행하고, 나머지 수업은 학교 선생님들이 맡는다. 학생들은 자신에게 맞는 수업을 신청해 듣거나 컴퓨터실에서 인터넷 강의를 들어도 무방하다.

이날은 수학 수업이 진행됐다. 민애는 “수학 성적이 좋지 않은 편이라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 기초를 다지고 있다”며 컴퓨터실로 향했다. 컴퓨터실에서 메신저나 웹서핑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 적은 없을까. 민애는 “모니터를 훤히 볼 수 있는 뒷자리에 감독 선생님이 늘 앉아 계시는 데다 교장선생님도 수시로 돌아다니셔서 딴짓을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후 11시30분까지는 독서실에서 자율학습을 하면 된다. 독서실은 학생마다 좌석이 지정돼 있어 출결 파악을 한눈에 할 수 있다. 민애는 “1층은 학년을 막론하고 성적 우수자들이 쓴다”며 “지금은 아니지만 2학년 때부터는 성적이 올라 1층 독서실에서 공부하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독서실은 책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였다. 소음이라곤 학교 밖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소리, 풀벌레 소리가 전부였다.

자율학습을 마치는 종이 울리자 독서실에서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왔다. 책을 싸안고 기숙사로 돌아가며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 모습이 정겨웠다. 하루 일과를 마치나 싶더니 기숙사 방마다 다시 불이 들어왔다. 민애는 “한 방에 4명씩 같이 생활하는데 거의 매일 오전 1시까지 더 공부하다 잔다”고 알려 줬다. 1시 이후에는 기숙사 전체를 소등해 버려 더 공부할 수 없다.

윤 교장은 학생들이 자습을 마치고 각자 기숙사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학교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집까지 10분 거리라 매일 학생들이 잠드는 것까지 보고 퇴근한다”고 말했다.

■자율학교=교육과정 운영, 학생 선발, 교과서 사용 등에 폭넓은 자율성을 갖는 학교. 전국에서 학생을 선발할 수 있으며 필기고사는 안 본다. 등록금은 일반계 고교와 비슷하다.
■안동 풍산고=2002년 자율학교로 지정된 기숙형 사립고. 1968년 개교한 뒤 90년 이농현상과 저출산으로 학생 수가 100명 이하로 줄어 폐교 위기에 몰렸다가 자율학교 지정 후 재도약했다.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각종 장학제도와 특성화교육이 더해져 지역 명문고로 발돋움했다. 신입생 학력은 중학교 내신 상위 3%다. 올해 풍산고 졸업생 79명 가운데 서울대 1명, 고려대 6명, 연세대 5명 등 대부분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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