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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반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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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388년 전의 인조반정과 50년 전의 5·16 군사 쿠데타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 ‘도둑을 맞으려면 개도 짖지 않는다’는 속담은 두 정변의 경우 ‘도둑을 맞으려면 개가 짖어도 들리지 않는다’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쿠데타 당일인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광평대군의 후손인 이이반(李而頒)은 길에서 만난 친족 이후원(李厚源)으로부터 ‘오늘 반정이 있으니 참가하자’는 권유를 받고 급히 광해군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광해군일기』는 ‘어수당(魚水堂)에서 술에 취한 광해군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고 전한다. 5·16 때도 쿠데타 관련 정보가 입수되었지만 장면 정부는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았다. 광해군 때 집권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된 것처럼 민주당 정권도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또한 광해군이 의관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던 것처럼 장면도 깔멜수녀원으로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쿠데타 초기 목숨 걸고 저항했다면 사태는 예측불허였을 것이다. 광해군이 정원군(定遠君)의 아들인 능양군(綾陽君)이 쿠데타의 주역일 줄 몰랐던 것처럼 장면도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킬 줄 몰랐다.

 『선조실록』 35년(1602) 6월조는 “여러 왕자들 중 임해군과 정원군이 일으키는 폐단이 한이 없어 남의 농토를 빼앗고 남의 노비를 빼앗았다”고 전하듯이 정원군은 악명 높은 왕자였다. 심지어 정원군의 하인들은 선조의 형이자 정원군의 백모(伯母)인 하원군(河原君) 부인을 납치해 사간원에서 ‘인간의 도리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장면 정권도 좌익 경력의 박정희 소장이 ‘국시를 반공’으로 삼는 정변을 일으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을 뒤엎는 곳에서 반전의 싹이 트는 법이다.

 인조반정은 시대착오적이었다. 떠오르는 후금(청)을 부인하고 망해가는 명나라를 섬기는 숭명배금(崇明排金) 정책으로 정묘·병자호란을 불렀다. 신분제 완화를 요구하는 사회의 흐름과는 달리 신분제를 강화하고, 주자학 외의 모든 사상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학문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한마디로 역사의 시계추를 거꾸로 돌린 잘못된 쿠데타였다. 동기도 과정도 결과도 모두 나빴다. 5·16도 헌정질서를 무력으로 뒤엎은 동기와 과정은 나빴다. 그러나 농업국가를 산업국가로 탈바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동기와 과정에 주목하느냐, 결과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