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기생충 우습게 보지 마라, 이들이 역사도 바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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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정준호 지음, 후마니타스
318쪽, 1만3500원

최근 대중과학서 중 독보적이다.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외면해온 기생충을 다뤘는데, 고정관념을 벗겨주는 것은 기본이다. 생명현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는 통찰력이 볼만한 데다 15세기 대항해시대 이후 제국주의 역사까지 기생충을 연결고리로 짚어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기생충의 파브르 곤충기’이자, 그 이상인 덕에 대중과학 저자의 스타 탄생도 짐작해본다. 저자는 젊은 국내 학자로, 영국 런던대에서 공부한 뒤 지금은 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서 근무 중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소외 받는 기생충에 관심과 사랑을!”이라는 유머 섞인 슬로건을 내세웠다. 기생충과 숙주의 공생·기생관계에 숨어있는 생명현상의 드라마를 따라가다 보면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지워진다. 생명현상에 무임승차하는 얄미운 녀석이 맞지만, 동시에 ‘생활의 달인’다운 모습에 경탄하기 때문이다. “감히 기생충에 대적하려는 신은 없다.” 책에 인용된 에머슨의 시와 함께 『장자』의 한 말씀도 생각난다. “자네에게 묻겠네. 사람이 습한 데에서 자면 허리가 아픈데 미꾸라지도 과연 그럴까?”

 책에 따르면 지구 생명종(600만 종)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기생충은 지구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생물”(32쪽)이다. 생물끼리 맺는 관계의 75%가 직·간접적으로 기생충과 관련 있다. 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와 소통하는 방식의 넷 중 셋은 기생충을 통한다는 얘기다. 기생충은 숙주의 의사결정이나 진화과정에 개입하거나 성을 탄생시킨 핵심 요인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가시고기 몸에서 붙어사는 촌충은 최종숙주 바닷새에 도달하기 위해 중간숙주의 몸과 마음에 ‘절묘한 장난’을 한다. 보통 가시고기는 바닷새가 나타나면 물 깊은 곳으로 피하지만, 촌충은 녀석을 조종해 공포감을 잊게 만든다. 기상천외한 생존전략인데, 그건 실로 부지기수라서 리베이로이아 흡충도 그러하다. 흡충은 뒷다리를 살집이 많게 만들거나, 다리 하나를 더 만드는 등 기형 개구리를 만들어놓는다.

 행동이 둔하게 만들어 새에 포획 당하도록 조종하는 것이다. 한때 살충제 등 환경호르몬의 영향 때문이라고 가늠됐지만, 주범은 기생충이다. 이런 생태계의 대하드라마는 인간의 좁은 시선을 버려야 포착된다. 이기적 생물의 대명사인 기생충에는 “가장 로맨틱한 생물 중의 하나”(267쪽)이자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는 주혈흡충도 있다. 본래 자웅동체였던 이 녀석은 그래서 “일부일처제의 형성과 발달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새로운 모델”로 통한다.

 기생충은 15세기 이후 대항해시대와 제국의 탄생에 개입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유럽인이 남아메리카로 건너간 뒤 원주민 90%를 몰살시킨 건 전염병과 함께 기생충 탓이었다. 이전까지 기생충을 ‘악마의 사술’로 이해됐던 유럽사회가 이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기생충학이 없었더라면 유럽 열강의 확장과 세계화도 없었다. 지금도 세계 10억 명 이상이 기생충에 감염된 채 살며, 감염성 질환은 지구인 사망 원인의 2위를 차지한다.

 그런 기생충이 매우 정치적 생물이라면 쉽게 믿어질까. 즉 불안한 사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한국인이라면 학생 시절 채변봉투의 기억이 있겠지만, 그런 박멸 노력 때문에 한국은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성과”(276쪽)로 학계에 보고됐다. 반면 북한 주민의 64.7%가 감염된 것으로 보고됐다.

 보너스 하나. 지팡이를 휘감고 올라가는 뱀을 그린 의학의 상징물. 그 동안 우리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이며, 뱀을 지혜의 상징물로 해석해왔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건 메디나충을 막대기로 둘둘 감아 뽑아내는 걸 형상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이 책에 나온다. 실제로 성경(민수기 21장)에 등장하는 ‘불뱀’은 메디나충을 말한다. 실은 기생충은 생명력도 대단하다. 엔간한 포르말린 용액으로 절여놓아도 회충은 끄떡없다. 옛 소련 과학자들이 사마르칸트 사막 근방에 회충 알을 묻어놓은 뒤 10년 뒤에 꺼냈더니 절반 가까이가 살아있었다. 예전에 비전 없는 전공을 선택했다는 저자는 이번에 ‘대박’을 쳤다. 최소한 책만 놓고 판단할 때 그렇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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