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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의 체념 “삼성·한화도 떠나고…아파트도 못 짓겠다니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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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1일 오전 세종시 건설공사로 파헤쳐진 충남 연기군 남면 송원리 일대를 주민이 둘러보고 있다. 멀리 세종시 첫마을 아파트가 보인다. [세종시=프리랜서 김성태]


“대기업들도 가 버렸구, 건설업체도 저 모냥(모양)이구. 세종시가 어찌 될지….”

9일 오전 세종시 건설 예정지인 충남 연기군 남면 양화리 마을회관. 주민 김용연(61)씨가 넋두리하듯 이런 말을 던졌다. 세종시에 아파트를 짓기로 했던 민간 건설사 10곳 중 7곳이 최근 500억원 가까운 위약금을 무릅쓰고 사업을 포기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중앙일보 5월 3일자 E4면>

임붕철(60) 이장은 “세종시가 과학비즈니스벨트 후보지에서 제외됐다는 소문도 돌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용연씨는 “그러니 여기 아파트를 지어 봐야 안 팔릴 것 같아 (건설업체들이) 빠져나가는 게지”라고 맞장구를 쳤다. 회관에 모인 주민들의 얘기는 온통 세종시의 현안과 앞날에 대한 것이었다. 맥이 빠진다는 투였지만 뜻밖에 담담하기도 했다. 예상을 아예 못한 건 아니라고들 했다. 이미 지난해 10월 비슷한 사태를 겪으면서 갖게 된 생각이었다. 당시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아파트 1만4800가구를 지을 부지를 건설업체에 분양하려 했으나 사겠다는 건설사가 하나도 없었다. 지난해 2차 필지 분양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2007년 1차 필지 분양분을 샀던 건설사들마저 포기를 선언한 것이다.

 세종시가 비틀거리고 있다. 지난해 6월 국회에서 수정안이 부결된 여파다. 투자하려던 대기업들은 발길을 돌렸고 건설사들마저 사업을 포기했다. 이대로는 ‘인구 50만의 자족도시’라는 건설 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종시는 원래 기획재정부 등 9부2처2청 등 36곳이 자리 잡을 예정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 12부4처2청 등 49개 기관이었다가 현 정부 들어 정부 조직이 바뀌면서 이전 대상 기관 수가 조정됐다. 그러나 청와대와 국회가 서울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다른 행정기구를 옮기면 비효율이 심각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비효율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한 해 3조~5조원에 이른다는 추산도 나왔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1월 중앙행정기관 대신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세종시에 만들고, 삼성·한화·웅진·롯데와 오스트리아 태양광기업인 SSF가 세종시에 미래형 에너지 등 첨단 연구·생산시설을 투자한다는 수정안을 내놨다. 정부는 세종시 땅을 싸게 주고, 소득세와 법인세를 3년간 안 받는다는 등의 ‘당근’으로 기업들의 투자 약속을 받아 냈다.


 그러나 수정안은 지난해 6월 국회에서 부결됐다. “세종시로 행정부처를 옮기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정치 논리에 밀렸다. 일각에선 “충청 표심을 의식한 ‘표’퓰리즘이 이성과 합리주의를 눌렀다”는 비판이 나왔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이임을 앞둔 지난해 8월 9일 기자간담회에서 “세종시 같은 중요한 문제를 놓고 정파·계파의 이해관계나 대권과 당리당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보고 정치 혐오를 느꼈다”고 말했다.

 정부가 내놨던, 과학비즈니스벨트 설립과 ‘기업들에 땅을 싸게 공급한다’는 인센티브도 수정안과 함께 폐기됐다. 그러자 기업들은 세종시를 포기했다. 과학비즈니스벨트가 불투명해져 국제 유수 연구개발(R&D) 기관과의 시너지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비싼 땅값 치러가며 세종시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는 이유였다.

 기업들은 발 빠르게 대체 부지를 찾았다. 지자체들도 세종시에 들어가려던 대기업에 특사를 보내 자기네 쪽으로 오라고 하는 등 유치전을 벌였다. 삼성은 세종시에 가려던 차세대 전지사업 부지로 최근 새만금을 택했다. 한화는 대전 대덕특구(국방미래연구소)와 전남 여수(태양광 생산시설)로 발길을 돌렸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태양광 등은 수많은 글로벌 기업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급히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더구나 기업들은 지난해 초 세종시에 투자하겠다고 한 뒤 수정안이 부결되기까지 6개월을 허송세월한 상태였다.

 1380억원을 들여 세종시에 태양광발전 관련 생산·연구시설을 지으려던 오스트리아 SSF는 수정안이 무산된 뒤 지금까지 세종시 측(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과 연락을 끊은 상태다.

 이들 5개 기업이 세종시에 만들려던 일자리는 약 2만3000개.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되면서 이만큼의 일자리가 다른 데로 갔다. 대신 원안대로 중앙 행정기구들이 들어오게 됐다지만 옮겨 오는 공무원과 국책기관 근로자는 1만3000명 남짓이다. 1만 명가량이 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주말이면 공무원들이 서울로 떠나 유령도시가 될 것이란 걱정도 있다. 실제 지난해 행정안전부가 세종시로 옮길 부처의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체의 35.4%가 “혼자 가겠다”고 했다.

 민간 건설사들이 거액의 위약금을 물어가면서 사업을 포기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유입 인구가 크게 줄면 아파트를 제값 받고 팔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요즘은 주택 경기가 좀체 살아나지 않는 상황이다. 사업을 포기한 건설사 임원 A씨는 “미분양이 뻔한데 사업을 계속하느니 차라리 계약금을 떼이는 편이 낫다는 게 경영진의 판단”이라고 전했다. 이 회사가 물어야 할 위약금은 60억원 정도. 하지만 사업을 계속하면 더 큰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LH는 재입찰을 통해 포기한 사업권을 다른 건설사에 넘길 예정이다. 하지만 성사 여부는 불투명하다. 손해가 뻔하니 맡을 건설사가 없어서다. 대형 건설업체의 한 임원은 “땅값을 내리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재입찰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시 사업이 이렇게 흘러가는 가운데 주민들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 세종시에 살다가 보상금 5000만원을 받고 충남 조치원 읍내로 이사 간 이완수(63)씨는 “건설업체들의 줄포기를 보니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빨리 아파트를 지으면 임대아파트라도 하나 얻어 다시 고향에 가려구 했는데, 언제 갈 수 있을라나 모르겄슈.”

세종시=김방현 기자, 서울=권혁주·황정일 기자
사진=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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