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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돼버린 금융을 아시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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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 원장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李箱)의 소설 ‘날개’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주인공은 유곽(遊廓)에서 일하는 여인의 남편이다. 아내의 직업상 주인공에게는 공간과 시간 차원에서 규제가 가해진다. 아내가 손님과 일하는 시간에는 그 방에 절대 갈 수 없다. 규율을 잘 지키면 아내는 밥도 차려주고 용돈도 준다. 어쨌든 주인공은 아내에게 종속돼 서식당하는 존재다. 시대적 상징성이 내재된 소설이지만 표면적으론 왜곡된 부부관계를 그렸다.

 “박제가 되어버린 금융을 아시오?” 글로벌 경제위기 후 기를 펴지 못하는 ‘금융’을 보면 날개의 주인공과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금융은 실물경제와 결혼했다. 글로벌 위기 후 날개의 주인공처럼 부부관계가 일그러졌다. “그것 봐라 금융이 설치니까 경제 위기가 왔지.” “금융은 그저 실물경제나 보조해야지 무슨 금융발전이냐.” 국내외적으로 너도 나도 금융을 비난한다. 금융사가 너무 커지면 안 된다는 주장부터 금융 혁신은 위험하니 금융상품을 모두 표준화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날개에서 주인공을 옥죄는 규칙처럼 규제가 금융을 숨 막히게 한다. 마치 날개의 주인공처럼 금융도 서식당하고 있다고 있다는 느낌이다.

 금융은 엄연히 독립된 산업이다. 날개의 주인공처럼 어디에 종속되거나 누구를 보조하는 산업이 아니다. 자금의 공급을 담당하고 있으니 오히려 실물경제를 이끈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의 경우를 보자. 과거 1970~80년대 같은 고도 성장기엔 투자 대상만 있으면 자금 조달엔 문제가 없었다. 수익성 높은 투자 대상이 풍부해 그야말로 물 반 고기 반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가. 신성장동력산업, 자원개발, 원전설비, 녹색산업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하나 자금 조달이 녹록한 분야가 없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먼저 금융이 제공돼야 기술개발이 가능한 시대가 됐다. 한국과 같이 자원이 부족하고 수출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선 첨단기술의 산업화가 바로 생존전략이다. 새로운 첨단기술엔 새로운 혁신금융이 필요하다. 전통적 금융으로는 첨단산업에 자금 공급이 어렵다. 가능해도 자본비용이 높아 국제경쟁력이 떨어진다. 혁신금융이 가능해지려면 금융산업 자체가 혁신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은행과 증권, 보험 모두 마찬가지다. 물론 시스템 위험과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련된 사안이면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 문제가 있으면 회사든 사람이든 철저히 가려내 일벌백계로 다뤄야 한다. 우려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우리가 키워야 할 금융산업, 땀 흘려 일하는 금융업 종사자들까지 매도당해 기가 죽어 있다는 점이다.

 날개에서 주인공은 아내와의 부부관계를 절름발이 관계라고 했다. 서로가 자유롭고 주체적이어야 절름발이가 안 된다. 금융과 실물의 관계, 금융과 정부의 관계도 절름발이가 돼선 안 된다. 주체성을 찾는 노력은 금융 스스로가 시작해야 한다. 날개의 주인공이 주체성을 찾게 된 것은 집 밖으로 외출하면서부터다. 넓은 세상을 보면서 자아를 찾고 스스로의 독립성을 느낄 수 있게 됐다. 날개의 주인공처럼 한국의 금융회사도 밖으로 나가야 한다. 경쟁력을 갖춰야만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밖으로 나가 부대껴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이상의 날개는 1930년대 식민지시대 자신의 능력을 마음대로 발휘하기 어려웠던 인텔리의 고뇌를 묘사하고 있다. ‘박제가 되어버린 금융’은 글로벌 금융위기 후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펼치지 못하는 금융의 고뇌를 표현한다. 이젠 금융도 날개를 펴고 날아야 할 때다.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처럼 말이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한국의 금융도 겨드랑이가 가렵다.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