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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대권 디딤돌 된 이기택, 정치는 한 치 앞을 모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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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호 12면

995년부터 DJ와 JP는 급속히 가까워지기 시작했지만 자리를 함께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러다 9월 22일 중앙일보 창간 30주년 행사장에서 만났다. 맨 오른쪽부터 JP와 DJ, 그 옆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김윤환 민자당 대표다. [중앙포토]

선거는 정치의 거의 모든 것이다. 무명의 정치신인이 혜성같이 등장해 영웅이 되거나 한때 정국을 좌우하던 거목이 일순간에 몰락하기도 한다. 선거는 모든 걸 바꿔 놓는다. 며칠 전 분당을과 김해, 그리고 강원도에서 치러진 4·27 재·보궐 선거 때 나타난 그대로다. 그런데 1995년 6월 27일 35년 만에 부활한 지방자치선거는 지금보다 판이 훨씬 컸다. 그 선거에는 거물 정치인 여러 명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DJ는 물론 당사자였다. 하지만 민자당을 박차고 나와 자민련을 창당한 김종필(JP) 총재와 김영삼(YS) 대통령까지도 선거 심판의 대상자였다. DJ를 넘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던 민주당 이기택 총재의 장래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눈앞에 보이진 않아도 DJ에겐 더 중요한 플러스 알파가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그가 네 번째로 대선에 출마해 승리할 수 있었던 씨앗의 대부분이 이미 그때 뿌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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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의 상황은 이래저래 DJ에게 유리했다. 집권당이 분열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DJ는 92년 대선에서 자신이 왜 패배했는지를 한순간도 잊지 않고 있었다. 부산·경남(PK)을 대변하는 YS와 충청도의 맹주인 JP, 거기에다 대구·경북을 상징하는 민자당의 노태우 대통령이 3당 합당을 해 반(反)DJ 전선을 형성했다는 사실 말이다. 만일 그런 상황이 계속 유지된다면 다음 선거도 해보나마나였다. 그런데 집권세력 내부에서 균열이 생겨났고, 그 틈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YS로부터 사정(司正) 한파를 맞은 대구·경북 지역의 민심은 싸늘했고 JP도 설욕을 꿈꾸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DJ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른바 지역등권론이다. 김대중 자서전(삼인출판사)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그때 나는 또 지역등권론(等權論)을 주장했다. 각 지역이 권리를 균등하게 나눠 갖고 수평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지역패권주의와 지역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TK패권주의, PK패권주의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특정 지역이 모든 권한과 헤택을 독점하고 나머지 지역은 소외받았습니다. 지역 간의 불균형과 파행이 나라 전체의 발전을 가로막아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6·27 지방선거를 계기로 바로 이러한 지역패권주의는 결정타를 입을 것입니다. 이번 선거로 패권주의가 아닌 등권주의,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으로 대등한 권리를 가진 지방화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제1권 651쪽)

지역등권론은 자칫하면 지역감정을 부추긴다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DJ는 그런 위험을 무릅썼다. 아예 한걸음을 더 나아갔다. 4월에 고려대학교 인근에 있는 승가대학에서 초청강연을 했는데 제목이 ‘내각제로도 통일이 가능하다’였다. 6월 8일에 이뤄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선 좀 더 구체적인 표현을 썼다. “선거가 끝나면 내각제 개헌 문제가 국민들 간에 초점으로 부각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전망한다. 과거에 내각제 반대한 사람들 중에서도 찬성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졌고 그 반대 경우도 있다. 그러니 민심을 한번 알아볼 때가 됐다. 내년 총선에선 권력 문제가 이슈가 될 게 분명하다. 국민의 뜻이 중요하다.” 여론에 따라선 내각제 개헌을 할 수도 있다는 걸 암시한 것이다.

하지만 DJ 지지자들 사이에선 반발도 적지 않았다. 오매불망 DJ를 대통령 한 번 만드는 걸 평생 소원으로 알고 살았는데, 정작 당사자가 내각제 얘기를 하니 왜 안 그러겠는가. DJ는 그걸 적절한 선에서 달랬다. 6월 1일엔 “등권론과 내각제는 무관하다. 동등한 권리를 누리자는 것이지 내각제로 가자는 권력구조 얘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도대체 왜 이리 왔다갔다 하느냐는 비난이 나올 만했다. 하지만 당시 DJ의 처지를 보면 그런 전략적 모호성을 밀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러브콜에 JP가 화답했다는 건 지난 호에 이미 말했다. DJ의 정계복귀는 본인이 결정할 문제지 남들이 왈가왈부할 게 못 된다고 말한 것이다. DJ의 정계복귀를 위해 JP가 주단을 깔아준 셈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두들 “DJ와 JP는 태생적으로 DNA가 맞지 않는다”고 했었다. DJ는 평생 박정희 대통령과 맞서 싸웠고 JP가 창설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됐었다. JP도 DJ를 공격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상대방 오장육부를 뒤집을 표현을 점잖게 돌려서 했다. ‘김대중씨는 아주 이~상한 정치인’이고 ‘매우 고약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던 두 사람이 YS 때문에 동병상련의 관계가 된 것이다.

지자체 선거 과정에서 DJ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사람도 있었다. 민주당 이기택 총재였다. 선거를 앞두고 같은 배는 탔지만 두 사람은 계속 충돌했다. DJ가 선택한 조순 전 부총리가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결정되자 이 총재는 경기지사 후보는 자신과 가까운 장경우 의원으로 해야겠다고 요구했다.

6월 5일 이 총재가 DJ를 찾아와 40여 분간 면담했다. DJ는 여론조사 결과를 들이댔다. 장경우 의원이 나가면 지고, 이종찬 고문을 내세우면 이긴다는 내용이었다. 이 총재는 완강했다. 20여 일 뒤에는 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DJ가 포기했다. 권노갑 부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총재단 회의에서 반대하지 말고 이 총재가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했다. 심경이 편할 리가 없었다. 이 총재를 따라온 기자들이 “합의가 됐느냐”고 물었다. DJ는 “이 총재가 경기지사는 장 의원으로 하겠다는데, 총재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일관된 입장이다. 조순-이종찬 후보가 환상의 카드라고 생각하지만 더 이상 말 안 하겠다”고 답했다. 다들 돌아간 뒤 소파에 앉아 창 밖을 보던 DJ가 독백하듯 말했다. “여론조사까지 제시했는데 이 총재가 끝까지 고집해요. 참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DJ와 이 총재는 후보 선정에서만 갈등을 빚은 게 아니다. 6월 8일 충남 공주를 방문한 이 총재는 “충청도당이 생기면 정치가 후퇴한다. 자민련이 선거 후 깨져버리면 가장 이상적인 양당 구도가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DJ는 JP가 민자당을 탈당하고 자민련을 창당해 지역 패권주의를 깼다고 칭찬했었다. 거기에 재를 뿌린 격이었다. 동교동계에선 “도대체 이 총재는 누구와 싸우느냐, 야권이 힘을 합쳐 민자당과 싸워야 하는데 JP를 공격하면 어쩌느냐”고 펄펄 뛰었지만 그렇다고 별 수도 없었다.

DJ와 이 총재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건 역시 세대교체론이었다. YS는 6월 19일 제주신문과의 창간 50주년 기념 회견에서 “정치권에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방선거 하루 전날인 26일에도 타임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똑같은 말을 했다. YS의 생각은 불 보듯 뻔했다. ‘내가 대통령을 했으니 이제 3김(金) 시대는 끝났다. 내가 물러감과 동시에 당신들도 더 이상 정치판에 발을 담그지 말라’는 것이었다. DJ는 여론이 이런 논리를 수용할까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총재가 한 술 더 떴다. 그는 “내가 매일 주장하던 걸 (YS가) 말한 것일 뿐이다. 아주 당연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이다. 이제는 선거가 끝나면 DJ와 이 총재가 더 이상 한솥밥을 먹을 수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게 돼 버렸다.

벌써 16년 전의 일이지만 나는 이 장면을 돌이킬 때마다 ‘정치인의 운명’이란 걸 생각한다. 이기택 총재의 도움으로 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가 된 장경우 의원은 선거에서 패배했다. 야심과 에너지가 넘치던 신한국당의 이인제 의원이 40대의 나이에 경기지사가 됐다. 만일 장 의원 대신에 애초에 DJ가 원했던 이종찬 고문이 선거에 나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결과야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당시의 여론 동향이나 YS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감을 감안하면 이종찬 고문이 경기지사가 됐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럼 97년 대선에서 이른바 ‘이인제 변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인제 의원이 경기지사에서 낙선했다면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지도 못했을 것이고, 나중에 이회창 후보에 반대해 당을 뛰쳐나가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97년 대선에서 DJ는 약 40만 표라는 박빙의 차이로 승리했다. 만일 여권표가 이회창과 이인제로 분열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최종 승자는 DJ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기택 총재가 장경우 의원을 고집해 이인제 의원이 당선됐기 때문에 DJ가 대통령이 됐다는 논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보다 더한 새옹지마가 있을까. 인생이라는 마차가 어디로 굴러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가슴이 서늘해진다.

6·27 지방선거가 끝난 뒤 언론은 DJ의 정계복귀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DJ는 목표가 보인다고 해서 ‘돌격 앞으로’ 하는 타입은 결코 아니다. 그는 이번에도 에둘러 갔다. 선거 다음 날인 6월 28일 DJ는 아태재단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이제 다시 아태재단으로 돌아가지만 현실정치와 통일문제에 대해 할 말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DJ는 정치의 한복판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아니, DJ 자신이 바로 정치 소용돌이의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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