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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통제 피해 소규모 동인지 속속 등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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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호 09면

‘창작과 비평사의 등록 취소’를 항의 하기 위해 1985년 12월 26일 문공부 매체국장실을 방문한 지식인들. 왼쪽부터 이우성·이효재·박완서·이호철·박연희·황순원씨. [중앙포토]

1980년 7월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두 계간지가 강제 폐간되면서 주로 이들을 통해 문학활동을 해오던 많은 문인들은 갑자기 의지할 곳을 잃게 되었다. 제도권 문단에서야 이들 두 계간지는 물론 그 지면을 무대로 활동하던 문인들조차 의도적으로 평가절하하고 있었지만, ‘문지’와 ‘창비’를 언급하지 않고서 70년대의 한국 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살벌한 정치상황이 언제 끝날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으므로 문인들은 스스로 활로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기 간행물이 아니면서 특수성과 연속성을 살려나갈 수 있는 잡지를 만드는 것이 일차적인 조건이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8> 문학운동의 새 양상 무크

그것은 단행본(book)이면서 잡지(magazine)의 성격을 지닌 부정기 간행물 곧 ‘무크’의 개념을 문학에 접목시키자는 시도였다. 사실 그와 같은 출판 경향은 70년대 초부터 전 세계적인 출판산업의 퇴조에 대비하기 위해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문학 혹은 출판물에 대한 정치적 억압의 반작용이었다는 점에서 다소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첫 출발이 반체제적 문학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기관지 격인 ‘실천문학’이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이 책이 신군부가 국가권력을 좌지우지하던 1980년 4월 첫선을 보였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실천문학’의 발간을 주도한 사람은 고은·이문구 등과 함께 ‘자실’의 창립에 앞장선 소설가 박태순이었다. 반체제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문인들을 돕고 민주화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자는,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그는 70년대에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이 보였던 영향력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그 두 계간지와는 색깔을 분명하게 달리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김진홍이 운영하던 출판사 ‘전예원’에서 출판하기로 하고 역시 같은 신문 해직기자 출신인 박병서를 편집동인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이 책은 출발부터 내부적인 난항을 겪었다. 출판기자 출신인 박병서는 “책은 우선 팔려야 한다”며 다소 야한 표지를 주장했고, 박태순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강하게 맞선 것이다. 심한 언쟁이 벌어진 끝에 표지가 새로 만들어지는 소동이 빚어졌다.

한데 ‘실천문학’으로 하여금 본격적인 ‘무크’지로 방향을 잡게 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신군부였다. ‘자실’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창비’ ‘문지’ 등 정기 간행물의 폐간 조치를 구상 중이던 관계당국은 ‘실천문학’ 첫 호가 발매되자마자 출판사 관계자를 불러 “1년에 한 번 이상 발행하면 정기 간행물로 간주하고 엄벌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말은 1년에 한 차례씩만 발행하면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래서 ‘실천문학’은 84년 10월까지 5호를 발행할 수 있게 된다.

‘실천문학’에 뒤이어 82년 5월 ‘문지’ 그룹은 또 다른 형태의 ‘무크 문예지’를 펴낸다. 이성복·이인성·정과리 등 김현의 후배이자 제자들이 주축을 이룬 ‘우리 세대의 문학’이 그것이다. 동인지 형태의 무크지였던 셈이다. 이 책은 후에 이름 한 자만 바꿔 ‘우리 시대의 문학’으로 속간되고 80년대 중반 이후 새 출발하는 동인지 ‘문학과 사회’의 모태가 된다. 이와 함께 ‘시운동’ ‘시와 경제’ ‘오월시’ ‘열린 시’ 등 무크 형태의 동인지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백낙청·정과리 등 몇몇 평론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이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우리 문학의 ‘소집단 운동’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권력자들의 눈을 교묘하게 가린 소집단 문학운동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84년 10월 말 4년 전 폐간됐던 ‘창작과 비평’이 부정기 간행물임을 명시한 같은 이름의 무크지 형식으로 다시 발행되고, 이듬해 2월 ‘실천문학’이 가까스로 정기 간행물 등록을 마친 뒤 계간지 발행을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낀 당국이 다시금 칼을 빼어 든 것이다. 문단과 화단의 친일 행태를 특집으로 다룬 제2호가 발행되면서 문화공보부는 8월 ‘실천문학’을 전격적으로 폐간 조치했다. 꼬투리는 두 가지였다. ‘문학과 예술 부문의 창작품을 게재하여 문화 창달과 예술 발전에 기여한다’는 등록 당시의 목적과는 달리 정치·경제·사회 문제를 다뤘다는 것이 그 하나였고, 이념 성향의 또 다른 무크지 ‘민중교육’을 발행했다는 것이 그 둘이었다.

‘실천문학’과 ‘민중교육’이 연계된 이 사건으로 ‘실천문학’ 주간인 송기원과 ‘민중교육’을 주도한 교사 시인 김진경·윤재철이 구속되는가 하면 집필자인 20여 명의 교사들이 집단 해직됐다. 송기원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출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국회에서는 이 사건을 놓고 여야 간에 공방이 치열했고, 서대문에 있던 ‘실천문학’ 사무실은 문인들의 항의 농성장으로 변했다. 황인철 등 몇몇 변호사가 법적 대응에 나섰고, 많은 문인들의 집단 항의가 이어졌지만 소득이 없었다. ‘실천문학’은 다시 부정기 간행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88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후에야 계간지로 환원됐다.

한데 그해 85년 12월 9일에는 또 다른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서울시가 느닷없이 창작과 비평사의 출판사 등록을 취소한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해 온 것이다. 고은 시인은 이 일을 “유언 한마디 말할 여유도 주지 않은 잔인한 사형 집행”이라고 표현했다. 곳곳에서 항의 농성이 벌어졌고, 원상 복구를 요구하는 각계의 건의문이 관계기관에 제출되는 등 문화예술계가 발칵 뒤집혔다. 범지식인의 서명운동이 벌어져 3000여 명이 동참했다. 12월 26일에는 황순원·박연희 등 원로 문인과 이효재·이우성 등 재야인사가 문공부를 찾아가 서명 원본을 전달했으나 소득은 없었다. 제5공화국은 그런 소동 속에서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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