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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판타지 옷을 입은 세 남매의 모험…불꽃놀이 보는 듯한 화려한 반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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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에메랄드 아틀라스
 존 스티븐스 지음
정희성 옮김, 비룡소
612쪽, 1만5000원

11년 전인 2000년 이맘때쯤 갓 출간된 『해리포터』를 읽었다. 엄청난 요술을 부리는 마법사들이 사실은 우리 이웃에 살고 있다는, 좀 황당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무척 재미있었다. 책을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동료 기자 몇 명은 “황당무계한 애들 책을 왜 읽느냐”고 핀잔을 줬다. 할 일이 그렇게 없느냐면서.

 돌이켜보면 그건 틀린 지적이었다. 아이 하나 딸린 이혼녀 조앤 롤링이 카페에 앉아 생계를 꾸리려고 쓰기 시작한 『해리포터』 시리즈는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4억권이 나갔다. 그 어떤 성인책도, 공포 소설의 대가라는 스티븐 킹의 호러물조차도 넘보기 힘든 숫자다. 책만 나갔나? 전체 7편의 시리즈 모두가 영화로 만들어졌고 비디오 게임도 불티나게 팔렸다.

하지만 조앤 롤링의 가장 큰 공로는 따로 있다. 이른바 ‘해리포터 신드롬’이다. 책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아이들이 “이제 그만 불끄고 자라”는 부모들의 성화까지 들어가며 책 속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 자체가 마법 같은 이야기다.

폭포를 건너는 저 아이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고아 세 남매의 희망 찾기를 그린 판타지 소설 『에메랄드 아틀라스』. 환상의 모험과 감동의 형제애가 보기 좋게 어울린다.

 가끔가다 궁금해진다. 수많은 어른조차 사로잡는 어린이책의 매력은 뭘까. 나는 ‘치유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판타지든 성장소설이든 어린이책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대부분 같다. ‘굳건한 의지로 어려움을 극복해 내라, 그럼 끝내는 선(善)이 승리할 것이다.’ 어쩜 그건 우리네 삭막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얘기일지도 모른다. 꿈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꿈을 가슴에 품으며 아이들은 튼튼하게 자라나고 상처받은 어른들은 새 희망을 품는다.

 미국 작가 존 스티븐스가 쓴 이 책은 특히 그런 ‘치유의 덕목’을 온전하게 갖춘 빼어난 작품이다. 예정된 세 권중에서 1권만 나왔기 때문에 이 시리즈가 과연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 혹은 『해리포터』의 뒤를 이어 판타지의 고전 반열에 오를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스티븐스의 시리즈에는 다른 판타지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차별성이 있다. 그것은 뭉클함이다.

 『에메랄드 아틀라스』는 환상을 다룬다. 거기에는 시간을 넘나드는 ‘시원의 책’이 존재하고, 악의 화신인 다이어 매그너스, 그의 하수인이 마녀 백작부인이 나온다. 영웅적인 거인 가브리엘과 지혜로 가득한 마법사 스태니슬라우스 핌박사, 용감한 난장이 드워프 족도 등장한다. 고아원에서 자라고 있는 세 남매 케이티와 마이클, 엠마. 그들은 부모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고아원을 전전했는지도 아득하다.

이들을 버텨주는 힘은 단 하나, 언젠가 부모가 찾아와 자신들을 힘껏 껴안아 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이다. 이들은 못된 고아원 원장에게 쫓겨나 케임브리지 폴스라는 삭막한 땅으로 추방되는데, 바로 그때부터 세 남매의 믿을 수 없는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만일 이런 정도에 불과했다면 이 책은 그저 수많은 재밌는 판타지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마법의 세계라는 환상적인 주제에다 천애고아로 남겨진 어린 세 남매의 형제애를 비범한 솜씨로 결합시킨다. 책을 읽다 보면 어린 시절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나 프랜시스 버넷의 『소공자』 『소공녀』 같은 고전에서 느꼈던 뭉클함과 애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가족과 형제애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판타지와 결합시킨 방식은 『나니아 연대기』보다 뛰어나다.

 『에메랄드 아틀라스』는 ‘좋은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하다’는 진리를 확인시켜 준다. 독자 서평에는 “책을 잡으면 손을 떼지 못하겠다”는 것도 있었다. 나는 안그랬다. 처음엔 좀 시큰둥했다. 한데 묘한 건 크게 재미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도 던져버릴 수는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책의 중반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그 앞에 깔려있던 복선이 일제히 매듭을 풀리기 시작하고, 불꽃놀이처럼 화려한 반전이 쉴새없이 터져나온다. 어지러울 정도다. 너무 정교한 퍼즐 같은 구성이기 때문에 끝부분에선 쉬엄쉬엄 생각하며 읽어야 할 것이다. 어쩜 그건 고전반열에 오른 모든 책들이 지닌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궁금하다.

김종혁 중앙SUNDAY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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