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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환영의 시시각각

웨스트민스터 수수께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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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환영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웨스트민스터라는 지명에는 수수께끼가 담겼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는 29일 영국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왕실 결혼식이 열린다. 이번 혼례는 영국이 군주정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군주정임에도 영국은 ‘웨스트민스터 민주주의’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으로 불리는 영국식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다. 영국 국회의사당(The Palace of Westminster) 이름에서 유래한 웨스트민스터 민주주의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쌍벽이다.

 종교·문화적인 웨스트민스터 미스터리도 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1646년 탄생해 1648년 영국 의회가 승인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세계 대다수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올해 400주년을 맞는 킹제임스성경이 탄생한 곳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400주년 기념행사는 11월 1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예루살렘 체임버에서 거행될 기념예배로 끝난다. 킹제임스성경의 최종 편집이 이뤄진 곳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킹제임스성경은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가 만들었지만, 영국을 넘어 전 세계 개신교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성공회는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에서 중도(via media)를 표방했다. 그래서 개신교 일부는 한때 성공회에 대해 ‘로마 가톨릭적(Romish)’이라는 ‘경멸적’ 평가를 한 역사도 있지만, 킹제임스성경은 20세기 중반까지 전 세계 절대다수 개신교회의 표준 성경이었다.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개신교 성직자 중에서 킹제임스성경으로 성경을 공부하지 않은 성직자는 거의 없을 정도다.

 웨스트민스터라는 지명과 엮인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영국방송협회(BBC)와 관련된 것이다. 세계 최대 방송사인 BBC의 본부는 웨스트민스터에 있다. BBC는 최근 방만한 경영이 도마에 올랐고 2017년까지 21억 달러의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 BBC는 지난 수년간 일련의 보도 스캔들로 고유의 색깔을 상실해 지나치게 위험회피적(risk-averse)이 됐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BBC의 위상을 위협하는 이런 시련을 감안해도 BBC 또한 웨스트민스터가 낳은 수수께끼다. BBC가 방송에서 사용하는 영어는 영국식 표준영어의 대명사다. 1922년 설립된 BBC는 세계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공영방송이다. 공영방송인 만큼 정부의 입김이 강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논조가 왔다 갔다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BBC는 보도에 있어 중립성·객관성·공정성의 대명사다.

 중도적이다 보니 BBC는 왼쪽에서 보면 우파요, 오른쪽에서 보면 좌파다. 윈스턴 처칠 총리는 BBC가 공산당의 소굴이라고 봤다. 1980년대에도 BBC는 마거릿 대처 총리 정부와 충돌했다. 포클랜드전쟁 당시에는 ‘비애국적’ 보도를 서슴지 않았다. 국가 안보나 국가 이익을 해친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BBC는 흔들리지 않았다. 한편 좌파는 BBC가 인종차별적이며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은밀히 대변한다고 비판한다. BBC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규 보도에 대해 한쪽에서는 친이스라엘, 다른 쪽에서는 친팔레스타인이라고 공격한다.

 영국은 왕정과 민주주의,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에서 독자적인 ‘제3의 길’을 갔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영국은 남들이 따라 하고 수용하고 싶은 불멸의 성과를 이룩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수수께끼는 어떻게 풀 수 있을까. 해답은 결국 ‘품질(quality)’에 있다. 영국 정치는 최고의 민주주의를, 킹제임스성경은 최고의 영역 성경을, BBC는 최고의 보도를 세상에 제공했다. 최고의 품질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념·사상이나 종교문화적인 측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웨스트민스터 정신’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29일 왕실 결혼식에서 화려함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의 정신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환영 중앙SUNDAY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