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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lobal] 전과자 출신의 영국 감독 톰 매길 “살인죄 복역자 8명 출연시켰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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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많은 소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소년은 13세 때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영국 본토로 이주하며 꿈을 잃는다.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왕따)을 당한 뒤 학교를 박차고 나온다. 열다섯 살 때다. 그 후 그는 술·마약·폭력에 찌들며 범죄의 나락에 빠진다. 결국 19세에 교도소 문에 들어선다. 3년 복역 후 마음을 바꾼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성공한 연극 배우의 길을 걷는다. 최근 그는 재소자 42명이 출연 배우·스태프 등을 모두 맡은 세계 최초의 영화를 선보였다. 살인 전과자 8명이 포함된 장기 재소자와 함께, 감시가 가장 삼엄한 북아일랜드의 맥하베리 교도소에서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 ‘미키 B’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톰 매길(Tom Magill·55) 영화감독 겸 ESC(벨파스트에 있는 교육자선단체) 공동 창업자를 만났다. 그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초청으로 얼마 전 한국을 찾았다.

글=김창규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아일랜드 출신 영국 소년, 그는 왕따였다

●어릴 때 어려움을 겪었는데.

 “영국에서 왕따를 심하게 당했다. 특히 이를 주도한 사람이 선생님이었다. 학생을 가르쳐야 할 선생님이 왕따를 주도하는 것을 보며 교육에 대해 회의가 들었고 반항심을 갖게 됐다. 학교가 싫어졌지만 내 자신이 더 싫어졌다.”

●학교를 그만두고 무엇을 했나.

 “학교에 있는 사람과 다른 가치를 찾는 사람과 어울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쁜 길로 가게 됐다.”

●스스로 전과자임을 거리낌 없이 밝히는데. 어떻게 죄를 짓게 됐나.

 “남의 차를 빼앗아 타고 다니는 갱단에 있었다. 그런데 조직원이 계속해서 경찰에 잡혀 갔다. 알고 보니 내부 고발자가 있었다. 내가 그 내부 고발자를 찾아 보복했다. 당시엔 내부 고발자가 조직원에 대한 헌신·신뢰를 배반했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경험 때문에 내 안에 있던 화를 누구에겐가 분출하고 싶었던 것 같다. 3년형을 받았다.”

●가정 환경도 어려웠겠다.

 “매우 가난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어머니는 가정부 일을 했다. 다른 사람은 잘사는데 난 그렇지 못한 게 싫었다. 그래서 가진 사람의 것을 훔쳤다. 조직에 들어가선 인정받기 위해 더 많이 훔쳤다.”

●교도소를 나온 후 생각이 바뀌었나.

 “아니다. 교도소에 들어간 뒤 한 달 만이었다. 아일랜드공화군(IRA) 출신의 프랭크 스태그라는 사람이 옆방에 있었다. IRA는 영국령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의 통일을 위해 영국의 주요 시설을 폭파했던 조직이었기 때문에 영국인에게 원한을 많이 샀다. 같은 방에 있던 영국인 재소자가 그를 칼로 찌르라고 부추겼다. 나는 어린 마음에 IRA 때문에 영국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교도소에서 만난 적이 인생을 바꾼 스승이 되다

●그래서 그에게 해를 가했나.

 “그는 당시 단식 투쟁을 했다. 나는 재소자에게 음식을 넣어주는 일을 했는데 밥을 주면서 어떻게 해칠까 고민했다. 계획을 세우면서 매우 흥분이 됐었다. 그런데 막상 그를 만나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당시 그는 44일간 단식을 하고 있어서 너무 야위어 있었다. 어린아이가 어른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몸무게가 30㎏ 남짓 돼 보였다. 그를 해칠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에게서 죽음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는 액센트 때문에 내가 벨파스트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그에게 ‘나는 벨파스트 출신이지만 우린 적이다’고 말했다. 나는 아일랜드, 이름 등 나의 모든 것을 싫어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교육을 받으라고 얘기해 줬다. 그러면 자신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후 어떻게 했나.

 “그날 바로 교도소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도서관에 있는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미국 갱 영화에 자주 나오는 배우와 닮은 사람이 표지에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존 스타인벡이었고, 책 이름은 『분노의 포도』였다. 그 책을 읽고 감정이입이 돼서 많이 울었고, 처음으로 예술을 통해 스스로 깨우치는 경험을 했다.”

●생활은 어떻게 바뀌었나.

 “이때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적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멘토, 스승이 된 것이었다. 그 후로 감옥에서 영문학 등을 공부하고 여러 가지 자격시험도 봤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2주 후 프랭크 스태그는 굶어서 죽었다. 영국 감옥에서 아일랜드 감옥으로 옮겨달라고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했지만….”

●출소 후 대학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한 것인가.

 “전공은 영문학이었다. 어느 날 친구가 배우 오디션을 볼 일이 있어서 따라간 적이 있다. 한 배우가 안 와서 내가 대신 대본을 읽게 됐다. 그런데 마침 역할이 갱스터였다. 나에게 너무 친숙한 역할이었다. 감독이 내 연기를 보고 매우 잘한다고 했고, 나는 그 역할을 맡았다. 당시 연극·오디션을 진행하던 작가나 감독은 중·상류계층이어서 갱스터의 말투, 행동 등을 잘 몰랐다. 내가 경험을 살려 각색을 도와주었다.”

연극에서 범죄자 역할 맡고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다

●느낌이 어땠나.

 “내가 차를 훔쳐 질주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나 흥분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범죄를 저지르는 심리 중 하나가 스릴과 흥분인데 그런 감정을 연극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연극을 하게 된 것인가.

 “그렇다. 영문학을 그만두고 연극으로 전향했다. 특히 반사회적 역할에 내가 캐스팅이 많이 됐다. 그래서 영화 ‘미키 B’처럼 전문 배우가 아닌 사람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다. 각자의 경험에서 나오는 강점을 활용하면 더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영화교육단체를 만들고 활동하게 된 계기는.

 “배우로 활동할 때였다. 1981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돌아가신 후에야 어머니가 가톨릭 신자였던 걸 알았다. 우리는 개신교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종교를 숨기고 평생을 사신 것이다. 그 후 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나는 영국인인가, 아일랜드인인가 등…. 그때 아일랜드 벨파스트로 돌아와 영화 교육을 해줄 수 있느냐는 제안을 받았고 이를 수락했다.”

●아일랜드를 떠나 영국에서 활동했다. 아일랜드 사람에게는 ‘배신자’로 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가기 전에 걱정을 좀 했다. 그곳 사람은 많은 상을 받은 연극인으로 나를 알고 있었다. 나에게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길 원했다. 그런 걱정이 기우였다는 걸 알게 됐다.”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교도소에서 교육하며 영화 착안하다

●‘미키 B’는 어떻게 착안했나.

 “북아일랜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영화 교육을 한 적이 있다. 이 교도소는 간수가 가운데에서만 활동하고 재소자는 나머지 구역에서 간수 없이 자율적으로 활동한다. 나는 이곳에서 IRA 출신 50명을 교육했다. 이때 이 교도소를 무대로 영화를 만드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사람들은 ‘미키 B’에 등장하는 교도소는 죄수가 운영하는데 이게 말이 되느냐고 묻곤 하지만 나는 말이 된다고 답해 준다.”

●영화에서는 살인이 일어난다. 교도소에서 그럴 수가 있나.

 “예전 아일랜드에서는 그런 일이 많았다. 한 지도자는 몰래 반입된 총에 살해되기도 했다.”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나.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주는 교훈처럼 야망과 탐욕은 재앙을 부른다는 점이다. IRA에 있는 사람이 한번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한 명을 죽일 때마다 4명의 적을 더 만든다. 그 4명은 당신이 죽인 사람의 관을 들고 가는 사람이다.’ 폭력의 부정당성, 잘못된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폭력으로 얼룩진 아일랜드 역사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왜 굳이 재소자를 배우로 썼나.

 “까다로운 재소자를 교육하기 위해 예술을 쓰는 방법을 생각한 것이다. 재소자를 파괴적인 사람이 아닌 창조적인 사람으로 보려 했다. 나 자신이 전과자로 예술 교육을 통해 내 인생을 바꾸었다. 이런 경험을 다른 재소자와 나누고 싶었다.”

●재소자나 교도소 측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려운 점이 많았다. 교도소 내에서도 까다로운 재소자 위주로 영화에 참여하는 것이라 교도소 측의 반대가 심했다. 재소자가 교도소 내에서 이런 활동을 하는 것 자체에 반대했다. 재소자에게는 개인 경험을 털어놓는 것부터 시작해 그들의 마음을 열게 했다.”

●재소자의 반응은.

 “매우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영화를 찍을 때 그들이 문제는 아니었다.”

영화 배우·스태프 중 8명이 살인자 … 그래도 탈 없이 마쳤다

●재소자는 연기 경험이 없는데 영화를 찍는 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

 “본인의 장점을 활용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경험이 많을수록 더 풍부한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재소자에게 개런티를 줬나.

 “그들에게 돈을 주는 것이 불법이다. 그러나 재소자 중에선 자기에게 개런티를 줄 수 있냐고 물어보기도 하더라(하하하).”

●영화 제작 후 나타난 변화는 무엇인가.

 “이 영화를 만드는 데 2년이 걸렸다. 영화 제작 기간 동안 폭력이나 절도 등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재소자 간의 분쟁도 생기지 않았다. 예컨대 한 사람은 영화 촬영 전만 해도 한 달에 100번 정도 간수로부터 경고를 받았는데, 이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에는 한 번도 경고를 받지 않았다고 했다. 덩컨 역을 맡았던 샘 매클린은 무장강도죄로 20년간 복역했는데 새로운 영화에 출연할 계획이며, 샘 헨리는 상해치사로 26년간 복역했으나 현재 ESC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일반 극장에선 상영되지 않고 있는데.

 “영화 제작이 끝난 후 3년 동안은 정부의 승인 없이는 상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화에 출연한 재소자로부터 희생당한 사람과 그 가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 부분을 특히 신경쓰고 있다. 당시 영화에 참여한 재소자 중 적어도 8명은 살인죄로 복역 중이었다.”

●관객의 반응은. 거부감은 없었나.

 “다양했다. 대체로 지지를 많이 해준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한국을 방문해 영화를 소개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의 문화예술 교육이 매우 앞서가고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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