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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세사람의 우정, 시들어가던 조선의 차 되살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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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삼국시대와 고려까지 융성했던 차 문화는 조선시대 들어 쇠퇴했다가 18∼19세기에 이르러 다시 꽃을 피웠다고 한다. 우리 차 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인물로는 다산 정약용, 초의 스님, 추사 김정희 등 3인이 손꼽힌다.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정민 지음, 김영사
752쪽, 3만5000원

웰빙 바람을 타고 전통차를 즐기는 문화가 만들어진 게 10년 내외이지만,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를 보니 굴곡이 참 많았다. 뜻밖에도 조선조 이후 차 문화는 소멸 내지 고사 직전의 상황이었다. 궁궐 납품용이 일부 만들어졌을 뿐이고 생산량 자체가 보잘 것 없었으니 일상의 기호음료로 차는 있는 둥 없는 둥 했다. 차밭은 돌보는 이 없이 황폐해졌고, 차는 배탈 났을 때 구급약 정도로 변했다. 찻잎을 고아 뭉친 뒤 약으로 먹었다는 게 저자의 말인데, 당장 의문이 든다. 그러면 적지 않은 차시(茶詩)란 무엇일까?

 사찰을 중심으로 차 전통이 이어졌을 게 아닌가? 그 이전 신라시대 화랑들이 수련할 때 차는 따라다녔다고 하고, 경주 남산에 부처님께 차 공양하는 스님이 등장하는 조각이란 무얼까? 고려시대에도 차 문화는 엄존했을 게 송나라 황제에게 바쳤던 용단승설차 네 덩어리가 가야사 석탑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맞다. 삼국시대와 고려까지 융성했던 차 문화는 조선 이후 무너졌다. 이 책에 따르면, 조선 후기 들어 차 문화 르네상스가 돌연히 이뤄졌는데, 그걸 창출해낸 게 3인방이다. 다산 정약용, 초의 스님, 추사 김정희가 그들이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그들 역할이 조금씩 달라 다산은 ‘차 문화의 중흥조’로 묘사된다. 그가 일일이 차 만드는 법을 전수했던 제자가 24세 연하의 초의 스님. 초의는 차 만드는 귀신이었다. 그래서 ‘전다(煎茶) 박사’이다. 추사는 뭘 했을까. 감식안이 아주 뛰어났다. ‘차 소믈리에’인 그가 초의에게 좋은 차를 만들도록 꼬드기고 기회마다 시음도 했으니 “추사가 없었으면 초의가 그만큼 빛날 수 없었을 것”(377쪽)이라는 게 저자의 말이다.

 신간은 차 문화 르네상스 기록인 동시에 18∼19세기 지성사이자 셋 사이의 도타운 우정 관계를 재구성한 훈훈한 보고서이다. 번역서의 홍수 속에 인문서의 향기 물씬한 읽을거리가 등장했다는 게 멋지다. 『미쳐야 미친다』, 『한시미학산책』 등에서 한학에 대한 깊이와 좋은 글맛을 함께 선보였던 한양대 교수 정민의 신작이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차시(茶詩)도 빼어난 우리말 번역으로 선보인다.

 이 책이 신뢰감을 주는 것은 숱한 한적(漢籍) 자료를 뒤져 전면 재구성한 공로 때문이다. 차 문외한이던 저자는 2006년 전남 강진을 찾았다가 초의의 『동다송(東茶頌)』에 한 구절 인용됐을 뿐 실물이 없던 『동다기(東茶記)』를 찾아냈다. 우연이었지만 그게 이 책의 출발이었다. 『동다기』는 다산의 저술로 잘못 알려져있던 상황이었다. 정민은 그 책이 진도 유배객 이덕리의 저술임을 밝혀냈다. 동시에 우리나라 첫 차서 『부풍향차보(扶風鄕茶譜)』를 발굴하여 두 책을 조선 후기 차 문화의 원점이자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있다.

 차 문화사의 오류도 바로잡았다. 수십 년 답습돼온 오류 중에는 다산이 초의에게 차를 배웠다는 설이 있다. 저자에 따르면 외려 그 반대다. 다산은 유배 전부터 차에 대한 식견이 많았다. 1805년 만덕산 백련사로 놀러갔다가 야생차을 발견한 뒤 차 만드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던 것이 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초의 차가 날개를 단 데는 추사 역할이 절대적이다. 차에 대한 애호를 예술로 승화시켯다. 동갑나기였던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50여 통의 편지는 차 이야기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을 정도다. 차를 얻기 위해 글씨를 써주고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 추사의 ‘명선’(茗禪, 58×115㎝)도 이때 쓰여졌다.

 ‘명선’은 차를 마시며 선에 들다는 뜻인데, 추사가 초의에게 줬던 아호이기도 했으니 이런 풍경 자체가 “차 문화사에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장면”(379쪽)이다. 다산·초의·추사 셋 사이의 우정은 우리 문화사에 보석인 셈이다. 그래서 이 책 부제도 ‘다산·추사·초의가 빚은 아름다운 차의 시대’로 되어있다. 보통 초의를 다성(茶聖)이라고 하는데, 이 책 이후부터는 ‘다성 삼위일체’ 혹은 ‘다성 트로이카’쯤으로 말을 바꿔야 할 판이다.

 조우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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