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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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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황창규
지식경제 R&D 전략기획단장

전쟁터와 같은 반도체 사업을 거쳐 삼성전자 기술총괄 사장(CTO)직을 떠날 때, 필자는 이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반 연구원으로 입사해 연구개발 총책임자로 현직을 마무리짓게 되니 감회가 깊습니다. 연구원들은 꿈을 가져야 합니다. 혼자 하겠다는 생각으로 자기만의 성을 쌓지 마십시오. 옆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항상 관심을 가지고 공동 목표를 향해 함께 매진하십시오. ” 눈시울을 붉히며 나를 환송해 준 연구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기업에서 20여 년, 정부 조직에서 1년. 매 순간 힘들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어딜 가든 피 말리는 경쟁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TV를 장식하는 각종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를 보라. 두세 명 영웅을 뽑는 과정에서 수천 명의 패자가 쏟아져 나온다. 경쟁이란 원래 그렇다. 승자는 극소수고 패자는 대다수다.

 물론 승리의 쾌감을 맛본 적이 더 많았지만, 나라고 항상 경쟁에서 이기지는 못했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이겼을 때는 이겨서 행복했고, 졌을 때는 재도전의 희망이 있어 행복했다.

 기업 재직 당시 기자들은 이렇게 묻곤 했다. “1년에 두 배씩 메모리 용량을 올리려면 사장님도 사장님이지만 연구원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요.” 나는 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몸은 물론 고달픕니다. 하지만 자기가 만든 반도체 기술로 세계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제품을 만들고, 또 이것이 신시장을 속속 창출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도전하게 됩니다. 이 기분은 고달픔을 누르고도 남습니다.”

 멋들어진 동기 부여가 있고, 도전해야 할 목표가 뚜렷하다면 몸이 힘든 건 문제도 아니다. 더구나 한두 번 실패했더라도 바로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까지 주어진다면 고달픔은 곧 기분 좋은 성취감으로 바뀐다.

 1만 번의 실패 끝에 겨우 한 번 성공한 에디슨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1만 번 실패한 게 아니라 전구가 작동하지 않는 1만 가지의 방법을 알아냈다.”

 국내외 유수 대학에서 특강 요청이 자주 들어온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학생들 대상 강의라면 열 일 제쳐두고 하는 편이다. 그런데 해외와 국내 대학의 강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해외 대학의 경우 강의 시작 전부터 인산인해다. 학제 간 연구 등 전공 외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제도와 환경이 이미 조성돼 있다는 증거다.

 반면에 국내 학생들은 학점과 상관없는 거라면 의욕을 보이지 않는다. 전공 학점 따기도 바빠 죽겠는데, 다른 분야 기웃거리며 한가하게 ‘융합’을 논할 마음의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질문도 차이가 있다. 학문 자체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려는 외국 학생들의 질문은 말 그대로 학생답다. 우리 학생들은 졸업 후 진로에 대한 질문이 많다. 좀 더 현실적이긴 하나 불안감이 엿보인다.

 최근 상황에서 보듯 우리 젊은이들은 방황하고 있다. 선천적 자질과 창조적 DNA를 가진 과학 영재들이 학점에 매달려 엉뚱한 아이디어를 시험할 여유가 없다. 과학기술계의 선배로서 좀 더 여유 있는 환경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치열한 경쟁을 이겨낼 정신적 양식을 제공하지 못한 게 부끄럽다. 그들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어루만져주기나 했었는지…. 쌍방향 소통을 일상화해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나는 평생을 첨단 기술에 묻혀 살았고, 또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소통과 스킨십에 관한 한 나는 아날로그 방식이 좋다. 시간과 노력이 좀 더 들더라도 직접 눈을 맞추며 소통하고 이해하는 것 이상의 효과적 방법은 없다. 과학 영재들일수록 개인적 고뇌를 더 예리하게 느낄 것이다. 교육환경의 인간화를 위해 과학계 전체의 노력과 지혜를 모으는 일을 더 이상 늦추지 말자.

 내가 하는 일에 미치면서도 이것이 남을 행복하게 할 기대감에 더욱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으로 가득한 사회, 한번 낙오자가 영원한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따뜻한 경쟁의 규칙을 깔아주는 사회. 기성세대들이여, 이런 사회 만드는 일을 계속 외면할 생각인가.

황창규 지식경제 R&D 전략기획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