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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d&] 군침 도는 아주 긴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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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축제 음식 고란토는 재미있다. 움푹 파인 큰 돌에 조개를 듬뿍 쌓고 그 위로 뚝배기를 올린다. 뚝배기 속엔 닭고기 육수를 비롯해 양고기·소시지·생선·완두콩이 들어간다. 맛도 독특하지만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어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홍어와 와인. ‘칠레’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다. 한국과 칠레는 2004년 아시아 국가와 남미 국가 사이에서는 최초로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이후 7년 동안 두 나라 교역량은 네 배 가까이 늘었다. 그러나 우리가 칠레에 대해 아는 것은 홍어와 와인이 거의 전부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여서인지 칠레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너무나 멀다.

그런데 칠레 정부가 지난달 초청장을 보내 왔다. 칠레 전통음식 여행에 초대한다는 것이었다. 한 나라에서 한 명씩, 모두 7명의 저널리스트가 칠레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칠레 전통 맛을 탐방한다는 제안이었다. 귀가 솔깃했다. 아니 입에 침이 돌았다. 칠레에 가면 무엇을 먹을 수 있을까. 8박9일 일정의 칠레 맛 여행에서 인상에 남은 세 가지 맛을 소개한다.

글=이상은 기자 사진=프리랜서 라셀리 주니가·이상은 기자

# 축제 때 먹는 고란토

1 엠파나다는 칠레 길거리 음식이다. 쇠고기와 삶은 달걀, 양파만 들어가는 게 칠레 전통 엠파나다다. 2 마푸체족 원주민 아니타가 만들어 준 키누아밥. 탱글탱글한 키누아는 안데스 산에서 자라는 고지대 곡물이다. 3 마푸체족의 반찬, 피뇨녜 샐러드. 피뇨녜는 감자과의 작은 채소인데 간을 거의 하지 않고 샐러드로 만들어 먹는다. 4 마푸체족의 해초 샐러드. 모든 음식에 간이 거의 되어 있지 않아서 조금 힘들었는데, 새콤달콤한 해초 샐러드를 먹으며 살아날 수 있었다.

칠레는 긴 해안과 높은 산맥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식재료가 정말 풍부하다. 연어·새우 같은 해산물부터 양고기·쇠고기 같은 육류까지 다양하다. 칠레 여행에서 맛본 것 중에서 가장 토속적인 음식 고란토 역시 해산물과 고기가 함께 들어가는 음식이다. 한 번 만들면 10인분은 기본이어서 칠레를 대표하는 전통 축제음식이기도 하다. 또 칠레 음식 중에서 드물게 국물이 있는 음식이다. 옛날 우리 조상이 잔칫날이면 돼지를 통째로 잡아 고기는 물론 국물까지 나눠 먹던 모습과 비슷하다.

 칠레 남부에 있는 도시 푸에르토바라스에서 고란토를 맛봤다. 고란토를 만들려면 바위만큼 큰 돌이 있어야 한다. 가운데가 움푹 파인 큰 돌에 숯불을 지피고 ‘피콜로코’라는 칠레산 대형 조개를 포함해 각종 조개류를 푸짐하게 쌓는다. 조개 위에는 뚝배기를 올린다. 뚝배기 안에는 푹 우린 닭고기 육수와 양고기·생선·완두콩·토마토가 가득 담긴다. 뚝배기 위에 큰 나뭇잎을 20장쯤 덮고, 나뭇잎이 날아가지 못하게끔 나뭇잎 위에 또 감자떡을 올린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났다. 나뭇잎을 열어 보니 수프가 펄펄 끓고 있다. 조개는 진작에 다 익었다. 조개구이는 한국에서 먹은 조개구이와 똑같았다. 뚝배기 수프에선 굉장히 진한 맛이 났다. 닭고기 육수에 양고기를 넣고 거기에 흰 살 생선까지 넣은 게 이상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맛은 우리나라의 해장국을 연상시킬 만큼 시원했다.

  # 길거리서 먹는 엠파나다

고란토가 특별한 날 먹는 음식이면 남미 만두 엠파나다는 칠레에서 가장 흔한 길거리 음식이다. 엠파나다는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방에서 유래했다. 다진 내용물을 패스트리 반죽으로 감싸 오븐에 굽거나 기름에 튀긴다. 반달 모양이고, 크기는 만들기 나름인데 칠레 길거리에서 파는 건 대체로 한국의 왕만두만 하다. 칠레에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손에 엠파나다를 들고 길을 걷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엠파나다는 이미 한국에서도 먹은 적이 있었다. 서울 이태원의 파라과이 음식점에서였다. 비슷한 맛이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많이 달랐다. 이번 여행에 동행한 브라질 음식잡지 ‘메뉴’의 루시아나 마트로사(32) 기자가 “남미에선 모두 엠파나다를 먹지만 내용물은 나라마다 다르다”고 알려줬다. 파라과이 엠파나다는 치즈가 듬뿍 들어가 맛이 촉촉했는데, 칠레 엠파나다는 퍽퍽했다. 파라과이 엠파나다는 햄이나 닭고기도 들어가지만 칠레 것에는 쇠고기와 삶은 달걀, 양파만 들어가는 점도 달랐다.

 한국의 길거리에 떡볶이 포장마차가 즐비한 것처럼 칠레 길거리엔 엠파나다 노점상이 줄지어 있다. 한끼 식사로 손색없었다. 값은 한국 돈으로 3000원 정도였다.

  # 원주민이 먹는 키누아밥

마푸체족 요리사 아니타. 칠레 원주민의 음식을 만들어줬다.

수도 산티아고에서 남서쪽으로 480㎞나 떨어진 원주민 마을 테무코. 거기에 칠레 원주민 마푸체 족이 살고 있다. 아직도 고유 문화를 지키고 사는 원주민으로, 현재 칠레 인구의 6%인 60여만 명 정도만 남아 있다.

 테무코 코라루헤 마을 산 중턱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마푸체 족의 전통 요리를 맛보기 전, 의식을 치러야 했다. 음료수를 땅에 붓는 마푸체 족 고유의 의식이었다. 음료수를 땅에 부으면 땅의 건강한 기운을 흡수할 수 있다고 마푸체 족은 믿고 있단다.

 우리 일행이 맛본 메인 요리는 키누아 호박밥이었다. 키누아는 안데스 산중에서 나는 고지대 곡물로 크기는 좁쌀만 하고 식감은 보리보다 훨씬 탱글탱글하다. 고대 잉카인은 고지대 곡물 키누아를 신성하게 여겨 태양신에 올리는 제사에 바쳤다고 한다.

 한국인이 쌀밥을 먹는 것처럼 칠레인은 키누아밥을 지어 먹는다. 아니타는 마푸체 족 전통 방식대로 키누아를 쪄 단호박과 버무렸다. 요리법은 단순했지만, 탱글탱글한 키누아와 부드러운 단호박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자아냈다. 반찬은 고지대에서 자라는 다양한 종류의 감자와 콩을 찐 요리가 나왔다. 칠레의 전통 음식은 의외로 단순했다. 강렬한 맛은 없었다. 기교가 전혀 없는 순수한 맛이었다.

홍어를 삭혀서 먹는다고요? 칠레인들 고개를 절레절레

일교차가 큰 날씨와 깨끗한 물, 튼튼한 토양이 만들어내는 칠레 포도.

이번 칠레 맛 여행단의 가장 큰 특징은 국적이 모두 다르다는 점이었다. 이른바 ‘다국적 맛 방랑단’이라고나 할까.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친숙한 나라부터 북유럽의 스웨덴·덴마크, 남미의 브라질·콜롬비아 등 솔직히 낯선 나라 출신이 더 많았다. 7개 나라의 음식 칼럼니스트들은 서로 상대방의 음식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음식 관련 서적을 8권이나 낸 캐나다 음식 칼럼니스트 루시 웨이버맨은 “지난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 맛봤던 김치찌개와 순대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며 유일한 아시아 국가 참가자를 반겼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깨끗했고, 고층 빌딩이 많았다. 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나라답게 산티아고 같은 대도시 길거리엔 삼성·현대·기아 같은 한국 대기업 간판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심지어 한류 바람까지 불고 있었다. 산티아고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마가리타 만다코빅(45)은 “산티아고에서 한국 가요가 인기가 많다”며 갑자기 샤이니의 ‘링딩동’을 불렀다. “18세의 딸이 샤이니와 슈퍼쥬니어 열혈 팬이라 강아지 이름을 태민(샤이니 멤버)이라고 지었다”는 얘기까지 들려줬다.

 반면 칠레에서 한국 음식은 아직 낯선 존재였다. 산티아고 번화가에 일식당은 많았지만 한식당은 없었다. 여행에 동행했던 칠레 셰프 크리스티앙은 “산티아고에서 스시는 트렌디한 이미지로 인기가 많지만 아직 한국 음식은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칠레 원주민 마푸체족의 음식은 인상적이었다. 단순하고 소박했지만 민족 고유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레스토랑 주인 아니타 에퓰레프(40)는 “매일 아침 산을 올라 그날 쓸 채소를 뜯어 온다”며 “하루에 손님을 10명만 받는다”고 말했다. ‘안데스산 첩첩산중에서 웬 원테이블 레스토랑이람?’ 혼자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아니타 에퓰레프가 기억에 두고두고 남을 이유를 설명했다. “음식을 통해 우리 마푸체족 아이들에게 정체성을 가르치고 싶어 식당을 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식당은 돈을 목적만으로 운영하는 게 아니었다.

 덴마크 칼럼니스트 도로시 플레칭거(53)는 “채소를 직접 가꿔 단순한 방식으로 요리하는 건 덴마크의 트렌디 레스토랑 ‘노마’의 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설명했다. 도로시의 평을 듣는 순간 우리 할머니들이 텃밭에서 뜯어 차린 푸성귀 가득한 시골 밥상이 떠올랐다.

 이참에 칠레에 관해 잘못 알려진 몇 가지를 알린다. 남미 음식이라면 맵고 강렬한 맛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칠레 음식은 거의 간을 하지 않는다. 건강식인 건 틀림없지만 자극적인 맛에 익숙한 한국인 입맛에는 많이 힘들었다. 그리고 홍어. 한국에선 그 흔한 칠레 홍어를 현지에서는 먹지 않았다. 홍어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일정 중에 만난 칠레 사람 가운데 홍어를 아는 사람은 셰프 크리스티앙밖에 없었다. 오히려 한국에서 엄청난 양의 칠레산 홍어를 수입해 삭혀 먹는다는 말에 칠레 사람들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은 기자

TIP  칠레에 자동차 수출하고 와인·홍어 수입하죠

남아메리카 서남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수도는 산티아고, 종교는 가톨릭, 언어는 스페인어다. 길이 약 4300km, 폭 175km로 국토가 좁고 길어 기후도 지역별로 다양하다. 한국과 칠레의 교역량은 지난해 4월부터 1년간 71억7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한국에서 칠레에 수출하는 주요 품목은 경유·자동차, 주요 수입 품목은 동괴 같은 산업 원자재와 적포도주·홍어·돼지고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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