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보안사요, 한수산씨 주소 알려주시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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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3월 초. 전두환 제12대 대통령 취임과 함께 제 5공화국이 출범한 지 며칠 지
나서였다. 박경리 소설가와 인터뷰할 일이 생겨 원주의 댁에 전화를 걸고 다음 날 아침나절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한데 그날 오후 데스크로 전화가 걸려왔다. 보안사령부 요원으로 신문사를 제 집 드나들 듯 드나들며 온갖 정보를 수집하던 H였다. 근처 다방에 있으니 좀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만나자마자 그는 대뜸 “박경리는 무슨 일로 만나려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저 단순히 문학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고 말하고 나서 어이가 없어 멀뚱하게 바라보기만 하자 그는 “시국 이야기는 안 하는 것이 좋겠다”며 “요즘 우리 회사가 몇몇 문인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12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기 전인 1월 24일 정부는 450여 일 만에 비상계엄령을 전면 해제하고, 대통령 취임 후에는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83명의 감형 및 사면을 단행하는 등 민심 수습을 위해 애쓰는 흔적은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정보·수사기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은 갈수록 심해졌다. 도청은 그 무렵 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최악의 무기였다. 그들은 언론기관은 물론 그들이 주목하는 개개인에게까지 무차별 도청을 감행했다. 몇몇 문화예술인은 전화로 비판적인 이야기를 나눴다가 기관에 불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있었으므로 음식점이나 다방 같은 곳에서도 주변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수산은 두어 해 전부터 제주도에 내려가 살고 있었다. 머리도 식히고 도시의 번잡을 피해 조용하게 살고 싶어서였다. 나의 강권으로 80년 5월 1일부터 ‘욕망의 거리’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하던 한수산은 한 달에 한 번쯤 서울로 올라와 나를 만났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을 한탄하고 어지러운 나라 꼴을 걱정했다. 모르긴 해도 그때부터 우리의 동태는 저들의 레이더망에 포착돼 있었을 것이다.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은 81년 5월 28일 오후 3시쯤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됐다. 전화는 “보안사 아무개 소령”이라고 발신자의 신분을 밝히고 “제주도의 한수산씨 집 주소를 알려달라”고 묻고 있었다. 보안사의 막강한 힘으로 한수산의 집 주소를 알아내지 못할 리 없고 보면 이 전화는 신문사에 우선 겁박을 주려는 의도였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본래 연재소설은 내 손을 거쳐 공무국에 넘겨졌으나 내가 문화부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 언제부턴가 소설은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은 채 넘겨졌고, 신문에 인쇄된 소설조차도 한동안 읽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지난 신문의 소설을 찾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쩌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 정부의 고위관리가 이상스레 촌스런 모자를 쓰고 탄광촌 같은 델 찾아가서 그 지방의 아낙네들과 악수를 하는 경우, 그 관리는 돌아가는 차 속에서면 다 잊을 게 뻔한데도 자기네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보고 들어주는 게 황공스럽기만 해서, 그 관리가 내미는 손을 잡고 수줍게 웃는 얼굴, 바로 그 얼굴들은 언제나 그렇게 닮아 있어서….’(5월 14일자·317회)

‘하여튼 세상에 남자놈 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그런 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 온 얘기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5월 22일자·324회)

어찌 보면 대수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지만 앞의 글은 누구나 전두환 대통령을 떠올리게 돼 있었고, 뒤의 글은 군대를 비아냥거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튿날 29일 출근하자마자 국장석에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이 들어 있는 소설 스크랩을 건넸다. 이어 열린 부장 회의에서도 각 데스크들이 소설 스크랩을 돌려가며 읽었다. 의견은 엇갈렸다. ‘이런 정도 가지고 문제를 삼는다는 것은 너무 졸렬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저네들이 묵과하겠느냐’는 의견도 있었다.

오전 10시쯤 보안사에서 손기상 국장대리 겸 문화부장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사태의 심각성을 예감케 했다. 그들은 “문화부의 일을 실질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은 누구냐” “신문의 연재소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신문에 실리게 되느냐” 따위를 캐물었던 것이다. 그날 오후 6시30분 보안사 요원들이 들이닥쳐 손기상을 연행해 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한수산은 이미 그 전날 제주도에서 압송돼 고초를 겪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H이사가 나를 찾았다. 그는 ‘보안사 통’으로 소문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한수산이 정 위원의 사주를 받고 그런 내용의 소설을 썼다고 자백했다더라”며 “고생 좀 하게 생겼으니 마음 단단히 먹어라”고 말했다. 곧 정장 차림의 보안사 요원 두 명이 나타나 현관 앞에 대기 중이던 검은색 승용차 뒷좌석에 태웠다. 출판부장 권영빈과 출판부 기자 이근성도 각기 다른 차로 연행돼 갔다. 얼마 전까지 출판부 기자로 재직하다가 퇴사한 허술도 자택에서 연행됐다.

나를 가운데 앉힌 양 옆의 두 사람은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날씨가 기막히게 좋네” “오늘 점심은 무얼 먹을까”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일 뿐 어떻게 봐도 악명 높은 ‘서빙고 저승사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보안사 서빙고 분실’은 공식 명칭으로는 ‘육군보안사령부 대공처 6과’였다. 이곳은 79년 10·26 사태 때는 김재규 등을, 12·12 사태 때는 정승화 등을 연행해 온갖 고문으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곳이었다. 그 후 신군부의 정권 창출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연행해 고문을 자행함으로써 외국에까지도 ‘빙고 호텔’로 불릴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후임으로 보안사령관에 취임한 사람이 노태우였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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