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성호준의 골프 다이어리 (10) 인기높은 여자골프, 난파선같은 KLPGA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23면

“너무 잘해서 미안합니다.”

LPGA 투어에서 뛰는 한 한국 선수의 아버지는 가끔 이런 죄책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LPGA 대회 수가 줄어든 이유는 영어도 못하고, 쇼맨십이 적은 한국 선수들이 LPGA 무대를 점령한 탓에 미국 내 투어의 인기가 줄고 있다는 눈총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리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니지만 코미디언 고 이주일씨의 유행어인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도 아니고, 잘해서 미안할 것은 없다. 잘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성적을 가지고 단죄를 해야 한다면 한국 선수만큼 하지 못하는 미국 선수들이 표적이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필드에서 뛰는 선수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2006년 LPGA 투어의 커미셔너 캐럴린 비벤스는 “언론사에서 취재했더라도 LPGA 대회에서 나온 기사와 사진의 저작권은 협회에 있다”고 선언했다. LPGA 관련 콘텐트의 소유권을 투어가 갖고 이를 통해 돈을 벌겠다는 계산이었다. 전문 경영인으로 커미셔너가 된 비벤스로서는 투어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안니카 소렌스탐이라는 여자 골프 사상 최고 스타를 보유했으니 그래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여자보다 훨씬 인기가 있는 남자 골프 투어는 물론, 다른 종목에서 이런 예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함께 성장해야 할 동반자들의 이익을 가로채 혼자 배를 불리겠다는 생각은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생태계를 흔드는 위험한 결정이기도 하다.

언론사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이후 미국의 주요 매체는 가급적 LPGA 투어를 다루지 않았다. LPGA 투어는 부랴부랴 이 정책을 철회했지만 냉랭한 언론의 시선을 바꾸지는 못했다. 요즘 한국에서도 LPGA 투어의 기사가 확 줄었다. 현장에 있는 미국 매체들이 LPGA 투어를 거의 취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보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비벤스의 실수는 이것만이 아니다. 대회를 열고 싶다는 새로운 스폰서들이 나타나자 기존 스폰서를 무시했다. 비벤스는 21년간 충성스럽게 LPGA 대회를 열던 한 스폰서의 대회 기간을 일방적으로 옮겨버렸다. 부동산 회사가 더 큰 상금을 내건 대회를 열 테니 그 자리를 비워달라고 해서다. 이 때문에 기존 스폰서와 소송 일보직전까지 갔다. 골프장 옆 빌라 분양을 위해 시끌벅적하게 대회를 개최한 부동산 회사는 한두 번 대회를 열다가 슬그머니 빠져버렸다. 옛 친구도, 새 친구도 LPGA 투어를 떠났다. LPGA 투어 대회가 확 줄어든 이유다.

한국 여자프로골프가 난파하고 있다. 회장이 갑작스레 사임하고 회장 직무대행을 선출했는데 하루 만에 정족수도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회장을 뽑았다. 절차상의 문제가 제기되자 회장은 또 사임해야 했다. 시즌 개막이 코앞인데 중계권 협상도 난항을 겪고 있다. 이렇게 가다간 올해 투어를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걱정도 된다.

KLPGA는 최근 큰 성장을 했다. 대회는 많아지고, 상금은 늘어났다. 그러나 욕심이 너무 과했다. 골프 방송사들은 “여자골프가 프로야구보다 많은 중계권료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공멸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KLPGA는 회장 선출 과정의 부당성을 지적한 미디어와도 갈등을 빚었다. LPGA 투어를 망가뜨린 비벤스의 정책이 연상된다.

골프계에서는 “최근 KLPGA에 일어난 보기 흉한 일들은 파이가 커지자 제 몫을 챙기려는 구성원들의 갈등”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협회 임원들은 “전임 회장이 인격적으로 회원들을 무시했다”고 하고, 전임 회장은 “회원 간의 파벌 싸움 탓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서로 내가 잘해서 투어의 규모가 커졌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KLPGA 투어가 성장한 가장 큰 이유는 KLPGA가 아니다. 국내 골프 채널을 비롯한 미디어의 관심도 주요 원인이며, LPGA 투어의 위축에 따른 반사이익도 컸다. 한국에서는 여자골프의 인기가 매우 높은데 LPGA 투어가 하락하자 팬들과 언론의 관심이 KLPGA 투어로 옮겨 온 것이다. LPGA 투어의 비벤스는 선수들에 의해 쫓겨났다. KLPGA 투어 집행부는 비벤스와 똑같은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성호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