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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앞서던 소콜 돌연 퇴장 … 버핏 후계 안개 속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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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후계자 경쟁은 가끔 우연에 따라 결판나곤 한다. 실력이나 업적으로만 승부가 결정되지 않는다. 미국의 경영권 승계 컨설턴트들이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에게 즐겨 해주는 조언이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81) 주변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그들의 말이 터무니없지는 않다. 버핏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인 데이비스 소콜(56)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낙마했다. 소콜은 버핏의 투자회사인 버크셔해서웨이 자회사인 네트제츠의 CEO다.

 이날 소콜은 “내 가족과 후손들을 위한 비즈니스를 일궈보고 싶다”는 편지를 버핏에게 띄우고 네트제츠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주 소박한 사퇴의 변이다. 하지만 블룸버그와 월스트리트 저널(WSJ), 파이낸셜 타임스(FT) 등은 하나같이“내부자 거래 혐의가 사퇴의 이유일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는 버핏이 인수합병(M&A)을 마무리 중인 미국 자동차 윤활유 전문기업인 루브리졸 주식을 사전에 사들여 이익을 챙기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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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소콜은 올 1월 5~7일 루브리졸 주식 9만6060주를 샀다. 버핏이 루브리졸 인수를 발표하기 약 2주 전이었다. 소콜의 지분 가치는 1월 7일 기준 992만 달러(110억원) 정도였다. 버핏의 인수 사실이 발표된 이후 루브리졸 주가는 30% 정도 올랐다. 지금 주식을 판다면 소콜은 적어도 300만 달러는 챙길 수 있다.

 소콜은 루브리졸 지분을 사들이고 일주일쯤 흐른 뒤 버핏을 찾아가 “훌륭한 기업을 발견했다”며 루브리졸 인수를 건의했다. 소콜은 버크셔해서웨이 M&A 최고 전문가였다. 2000년 이후 사들인 기업들은 대부분 소콜이 먼저 ‘간을 봤다’. 그런 업적 때문인지 버핏은 루브리졸 인수를 선뜻 승인했다.

버핏은 지난달 30일 공개한 편지에서 “소콜이 루브리졸 주식을 산 사실을 보고받을 당시엔 신경 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루브리졸 인수를 심사하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소콜의 주식 매수에 대해 내사에 들어갔다. 버핏과 소콜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둘은 결단했다. 버핏은 “소콜이 오래전부터 사직을 요청했으나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이제는 그가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버핏이 충복인 소콜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립서비스로 풀이됐다.

 소콜은 연봉으로 1000만 달러 이상을 받았다. 게다가 버핏의 유력 후계자였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미 경영자 시장에서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런 그가 푼돈(?) 몇 백만 달러를 벌기 위해 내부자거래를 했을까. FT는 “선뜻 이해할 수 없다”며 “버핏의 유력한 후계자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경쟁 대열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현자(버핏)’ 이후가 불확실해졌다”고 전했다.

 버핏은 자신이 맡고 있는 버크셔해서웨이 회장·CEO·CIO 자리를 나눠 물려줄 요량이다. 회장은 사실상 내정됐다. 장남인 하워드 버핏(57)이다. 버핏의 펀드매니저 격인 최고자산운용책임자(CIO) 후보로는 토드 콤스(40)가 있다. 콤스는 아직 낙점을 받지는 않았다. 버핏은 또 다른 후보를 물색해 경쟁을 붙일 가능성이 크다. 소콜의 탈락으로 판이 흔들리는 쪽은 버크셔해서웨이 CEO 자리다. 소콜이 물러나기 전까진 다섯 명이 경합했다. 소콜을 선두로 아지트 자인(60) 재보험 총괄과 그레그 아벨(49) 미드아메리칸그룹 회장, 토니 나이슬리(65) 자동차보험 가이코 대표, 매슈 로스(51) 철도회사 벌링턴노던샌타페이 CEO 등이었다.

 남은 네 사람 모두 필살기 하나씩은 갖췄다. 자인은 버크셔해서웨이 주력 업종인 보험을 지휘한다. 버핏에게 가장 많은 현금을 안겨준다. 그 현금이 아니라면 버핏의 M&A가 힘들 수도 있다. 아벨은 애물단지인 에너지 부문을 혁신해 수익머신으로 바꿔놓았다. 경쟁자 가운데 가장 젊다. 나이슬리는 미 자동차보험 시장에서 꼴찌였던 가이코를 5대 회사 가운데 하나로 키웠다. 로스는 버핏 후계구룹의 신출내기다. 버핏이 요즘 푹 빠져 있는 ‘새 장난감’인 철도회사를 지휘한다. 그는 부실덩어리 벌팅턴을 흑자기업으로 탈바꿈시켜 2009년 버핏에게 헌사했다.

 네 사람 업적과 능력은 서로 견주기 힘들다. 버핏은 올 2월“후보 4명을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는 소콜의 루브리졸 주식 매수건이 버크셔해서웨이 내부에서 논란이 되기 시작할 때였다. WSJ는“남은 네 명의 능력과 업적 차이는 거의 없다”며 “돌발 사건이 승패를 가를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지난달 30일 전망했다. 버핏의 후계구도가 한결 불투명해졌다는 얘기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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