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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01)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돌아눕는 뼈 1

봄이 깊어가면서, 나의 말굽은 가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제석궁’에 다녀오고부터 성장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더운 피를 충분히 마셨기 때문인 것 같았다. 뻔뻔스럽게도 말굽은 아무 일이 없는 한낮에도 피부 밑으로 완전히 숨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손바닥을 벗어나 손가락과 팔목으로까지 제 영역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 사이 손가락은 줄어들어 이제 겨우 한 마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한 마디조차 말굽이 뻗어나가 거의 잡아먹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말굽은 어느덧 원래의 말굽형상을 잃어버리고 이상한 형태로 변모해 있었다. 말굽은 결국 팔의 상단으로까지 영토를 확장할 모양이었다. 아니 언젠가 나의 전신이 말굽으로 변모할 날이 기어코 올 터였다. 햇빛에 비쳐보면 검푸른 색깔로 박혀 있는 이상한 형상의 말굽이 얇은 피부 너머로 어렴풋이 보였다. 그것은 분명 살아 있었다. 어떤 파장에 의해 가만히 물결치는 말굽의 살아 있는 형상은 때로 아름답게 보이기도 했다. 행여 누구에게 들킬까 봐 나는 손바닥에 밴드를 붙였고, 식사시간에도 장갑을 꼈다.

“장갑을 끼고 밥을 먹네?”
“상처 난 자리가 도져서요.”
사람들은 묻고 나는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희귀성 불치병에 걸렸는지도 몰랐다. 만약 이것이 희귀성 불치병이라면, 가까운 곳에 또 하나의 희귀성 불치병 환자가 있었다. 바로 이사장이 그랬다. 이사장은 매일매일 샹그리라 뒤뜰에서 이른 새벽에 검무를 추었다. 웃통을 완전히 벗어젖히고 군도를 든 이사장의 모습은 처음 그를 만나던 날 그대로 여전히 세상의 모든 에너지가 응집된 것 같은 옹골찬 견고함을 보여주었다. 산맥같이 일어선 근육들과 아침햇빛처럼 뻗어 나오는 눈빛, 그리고 허공을 자유자재로 베고 흐르는 검흔(劍欣)이 빚어내는 날렵한 선분들은 차라리 하나의 초월적인 미학이라 할 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문명으로 세계가 잃어버린 원초적인 청춘의 푸른 광채로 보였다.

그러나 얼굴은 전혀 달랐다.
그 무렵의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도 거의 빠져나가 완전한 대머리인 데다가 주름살은 턱없이 늘어 이제 적어도 팔순을 넘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몸의 근육들은 나날이 젊어지고 얼굴만 가속적으로 늙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가족회의’에서 이르기를, 청춘의 몸과 노인의 얼굴을 스스로 원함으로써, 의식의 조절을 통해 그것을 실현시키고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그렇듯이 그도 이를테면 불치병에 걸린 것이었다. 최순경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사장 병원에 다니고 있어요.”
“무슨 병인데?”
“매주 피를 간대요. 희귀성불치병이래요.”

요즘은 반지르르하던 이마까지 주름살투성이였다. 천년을 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주름살들 물결은 얼굴에만 머물지 않고 이마를 넘어 머리통으로까지 확장되고 있었다. 쪼글쪼글해져서 머리통은 요철이 심한 골을 닮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의 말굽처럼, 주름살이 점차 영역을 확장해 그의 머리통까지 잡아먹을 요량인 듯했다. 늙어가는 얼굴과 원초적 청춘으로 갈린 경계선은 목 하단에 위치해 있었다. 부조화의 극치였다. 의식의 조절을 통해 주름살의 가속적인 확장을 얼굴로 제한, 목에서 스스로 제어하고 있다면, 목의 하단에 일종의 주름살 방어선이 존재하고 있는 셈이었다. 늙어가는 얼굴과 젊어지는 육체 사이엔, 형상의 부조화를 넘어, 어쩌면 지금 피어린 영토싸움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제석궁’에서의 사건이 정신착란에 걸린 미소보살의 남편의 우발적 살인으로 귀결되고 나서 한동안 사라졌던 미소보살이 다시 명안진사에 나타난 것은 3월이 다 지날 무렵이었다. 명안진사는 그때 짓다가 방치해두었던 문화궁을 다시 짓느라 안팎으로 난삽하고 소란스러웠다. 곧 건축허가가 날 것으로 기대되는 복지 휴양시설의 터를 닦느라 여러 대의 포클레인까지 들어와 있던 참이었다. 정문을 통과해 들어온 택시에서 미소보살이 내렸다. 백주사를 비롯한 몇 사람이 늦은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저거, 미소보살…….”
백주사가 먼저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어디 있었던지, 애기보살이 먼저 쪼르르 제 어머니에게 달려 나갔다. 거의 두 주일만의 출현이었다. 햇빛이 쨍쨍했다.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미소보살이 달려드는 애기보살을 슬쩍 뿌리치는 듯 하고 나서 곧장 식당 건물 쪽으로 걸어왔다. 백주사와 내가 문을 열고 나갔다. 미소보살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어왔다. 많이 지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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