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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통에 용케 살아나 폐허 속에서 이만큼 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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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호 10면

어느 시대건 아기들은 태어나고 청년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대중가요사를 살펴보면 어느 시대나 청년이 부상하는 것은 아니며, 언제나 같은 모습인 것도 아니다. 어느 시대건 어른들이 청년들을 못마땅해 했다는 것만 빼놓고는 시대에 따라 청년의 모습은 꽤나 다르게 나타났다. 1970년대에 청바지나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통기타를 들고 나선 청년들의 모습과 비교하면 불과 4~5년 전인 60년대 청년들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2> 맨발로 뛰는 뒷골목 청춘들, 그들의 1960년대

한국대중예술사 속에서 60년대 청년은 ‘청춘’이라 불렸다. 70년대 청년문화만은 못했지만 그 ‘청춘’ 바람도 상당히 강풍이었다. 70년 월간지 『세대』에 남재희가 ‘청춘문화론’이라는 제목으로 청년문화 열풍을 설명할 정도였으니 60년대에 청춘이라는 말이 얼마나 유행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시작은 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사진)이었다.

신성일과 엄앵란 커플, ‘청춘영화’ 붐 등 수많은 문화현상을 만들어낸 이 영화는 지금 보아도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다. 물론 2배속으로 돌려보아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느린 속도와 성우 이창환의 느끼한 목소리가(그때는 그것이 가장 인기 있는 젊은 주인공 목소리였다) 다소 거슬리기는 한다. 하지만 주인공 신성일이 하얀 가죽점퍼에 발목까지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마치 제임스 딘처럼 상대편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은 채 불안한 시선으로 방황하는 젊은 영혼을 연기하는 모습은 이 영화가 지닌 젊은 감각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이 영화는 한국대중가요사에서도 중요한 작품이다. 주제가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 때문이다. 이봉조가 작곡한 재즈 스타일의 주제가와 영화음악은 건축과 출신의 젊은 작곡가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물론 그 인기에 큰 몫을 담당한 것은 기막힌 가사였다.
“눈물도 한숨도 나 홀로 씹어 삼키며 / 밤거리에 뒷골목을 헤매고 다녀도 / 사랑만은 단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마라 / 그대를 태양처럼 그리워하는 /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

방송 극작가 유호가 쓴 이 가사가 얼마나 많은 청춘들의 가슴을 울렸을까 싶다. ‘나 홀로 씹어 삼키며’에서부터 가슴을 뛰게 만들다가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마라’ 대목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올 지경이다. 이후 유호와 이봉조는 호흡을 맞추어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 남일해의 ‘맨발로 뛰어라’, 최희준의 ‘종점’ ‘오인의 건달’, 정훈희의 ‘좋아서 만났지요’까지 인기가요를 쏟아낸다. 해방 후부터 ‘럭키 서울’ ‘비 내리는 고모령’ ‘전우야 잘 자라’ ‘서울야곡’ 등의 노래를 작사했던 유호가 트로트 시대를 벗어나 ‘맨발의 청춘’을 거쳐 신중현 작곡의 ‘님은 먼 곳에’까지 히트작을 내놓는 그 저력이 놀랍기만 하다.

‘맨발의 청춘’에서 확인되듯 60년대의 청춘은 ‘맨발’로 ‘뒷골목 밤거리’를 헤매는 ‘거리의 자식’이다. 뒤를 이었던 남일해의 ‘맨발로 뛰어라’나 최희준의 ‘오인의 건달’, 혹은 김상국이 루이 암스트롱 같은 목소리로 부른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나 ‘불나비’ 같은 노래 역시 도시의 뒷골목 감수성이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전쟁의 어두컴컴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휴전한 지 불과 10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니, 전쟁통에 용케 살아남은 어린애가 폐허의 도시에서 ‘거리의 자식’으로 자라난 것이다. 재즈의 흑인적 감수성 역시 우리에게는 미군부대 밤무대를 연상하게 하니 이 역시 전쟁의 흔적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이 암울할 듯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전후의 피폐함을 극복하고 ‘잘살아 보세’의 구호로 전진하자는 경제개발의 희망 속으로 포섭될 수 있었다. “돈 없다 괄세 마오 무정한 아가씨 / 캄캄한 쥐구멍도 볕들 날 있소 / 모를 건 사람의 팔자라고 하는데 / 그렇게 쌀쌀할 건 없지 않겠소”(김상국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나,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 사람 없어 비워둔 의자는 없더라 / (중략) / 아아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김용만 ‘회전의자’) 같은 노래가 보여주는 돈에 대한 강한 욕망은 60년대 청춘들의 꿈이 어디로 모아지고 있었는지 확인하게 해준다.

그럼 이 시대 젊은 여자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히스테리가 이만저만”(최희준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이라고 노래할 정도로 남자에게 신경질을 낼 줄도 알지만, 그들의 관심은 “서울의 아가씨는 명랑한 아가씨 남산의 꽃이 피면 라라라라 라라라” 혹은 “여덟 시 통근길에 대머리 총각”(김상희 ‘대머리 총각’)에만 쏠려 있고, “아무리 남성금지구역이라도 (중략) 믿음직한 바지씨는 어디 계실까”(이시스터즈 ‘남성금지구역’)라고 노래했으니, 그들의 인생 고민은 연애와 결혼에만 묶여 있었던 듯하다. 남자들처럼 거리의 자식이라는 진지한 자의식도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70년대 청년문화가 60년대를 계승하며 발전시키기는 참으로 힘들었을 듯하다. 70년대의 청년은 60년대의 청춘들과 달리 자신의 삶에서 전쟁의 그림자를 지워버린 새로운 세대였다. 이들의 세계는 어둠이 아닌 밝은 대낮이었다. 이들은 라일락 피는 대학 교정이나 대낮의 길가에 앉아서, 혹은 바닷가에서 조개껍질 묶으며, 혹은 모닥불 피워놓고 자신들의 꿈을 키웠으니, ‘밤거리 뒷골목’ ‘거리의 자식들’과 그 꿈이 같았을 리가 없다. 청바지에 쇼트커트를 한 여자가수가 남자도 감당하기 힘든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라는 선지자적 어투로 결단의 선언을 노래했던 시대가 바로 70년대 초였다. 60년대 청춘 바람이 분 지 불과 4, 5년 만에 이를 뒤엎는 청년문화가 태풍처럼 몰려온 것은 그만큼 이들이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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