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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새천년 도전현장] '테헤란 밸리'엔 밤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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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 지하철 2호선 역삼역 옆 서울벤처타운 빌딩. 자정이 가까운데도 46개 벤처기업 가운데 상당수가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16층 전자상거래용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인 이네트정보통신. 전체 직원 40명 중 출장자를 뺀 30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직원수보다 많은 컴퓨터 모니터의 열기와 직원들의 정열이 섞여 영하의 날씨를 녹이고 있었다.

열심히 토론을 벌이는 연구원들, 책을 보는 직원, 야식을 드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다.

"밤에 일하면 아이디어가 훨씬 잘 떠올라요. 사이버 세계를 하루라도 빨리 현실로 만들어야죠. "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출신으로 올해 입사한 김기열(29) 연구원은 회사 주변 숙소에서 묵기도 하고 사무실 바닥에서 토끼잠을 자기도 한다. 집에 가는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경비원 김영기씨는 "밤을 꼬박 새우는 회사 직원들이 많아요. 요즘 젊은이들 대단합니다" 라며 혀를 내두른다. 이 빌딩 지하 편의점 주경훈 점장은 하루 매출의 20% 정도는 밤에 이뤄진다고 말했다.

새 천년을 불과 십여일 앞둔, 한국의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테헤란 밸리'' 의 밤 풍경이다.

지하철 2호선 삼성~서초역에 이르기까지 2백여 벤처기업들이 몰려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한두 블록 벗어난 지역과 양재-포이 밸리, 압구정동까지 합하면 1천3백~1천5백여개의 벤처기업이 몰려 있다(정보통신부 추산) . 주축은 20~30대 젊은층으로 40대 이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의 무기는 ''자신감'' 이다.
''새 천년은 우리 것'' 이란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지 않는다.
소프트웨어 개발, 인터넷 서비스, 특수 반도체 설계 등을 하면서 밤을 새는 정열로 승부를 건다.

네트워크 장비업체인 미디어 링크 하정률 사장은 "직원들과 회식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다" 면서 "우리의 경쟁상대는 국내기업이 아니라 미국의 루슨트 테크놀로지나 시스코" 라고 강조한다.

테헤란 밸리만이 아니다.
전국에 속속 등장하는 벤처타운들도 새천년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기존의 토착산업과 연계해 지역경제의 구조를 바꾸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대전 유성구 대덕연구단지를 중심으로 한 대덕 테크노 밸리에는 3백여개의 벤처기업이 몰려 있다.
한국과학기술원.원자력연구소.전자통신연구원 등 60개의 연구소와 충남대.대덕대 등 산.학.연이 어우러져 있다.

강원도 춘천의 디지털 스튜디오 벤처 스트리트는 동사무소 건물을 개조해 60여개 애니메이션 업체들이 한국판 월트 디즈니의 꿈을 키우고 있다.

경북 포항은 포항공대와 포항제철이 중심이 돼 테크노 파크를 조성 중이며, 경남 창원은 향후 5년동안 4천여억원을 투자해 지식집약형 기계산업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구는 섬유산업과 기술.지식정보를 결합시킨 밀라노 프로젝트를, 울산은 울산~경주구간에 자동차 특화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인천 송도 신도시의 미디어 밸리와 광주의 광(光) 산업단지는 덩치가 큰 첨단단지로 꼽힌다.
송도 미디어 밸리는 대만의 신주(新竹) 단지를 본떠 2천55개의 정보통신 업체와 배후도시, 정보통신대학원.소프트웨어대학, 생활편익시설 등이 함께 들어가는 종합타운으로 조성된다.

광주 광산업단지는 4천여억원을 들여 광산업기술원을 세우고 광통신.광정보기기.광정밀기기 등의 벤처기업을 2001년부터 입주시킬 계획이다.

전국으로 번지는 이같은 열기에도 불구하고 벤처산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미미한 편이다. 지난 11월말 현재 벤처기업수(중기청 확인 업체 기준) 는 4천7백83개. 2백70만여개 중소기업의 1.7% 수준이다.

국내총생산(GDP) 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 경제활동인구에서 차지하는 벤처기업 종사자 비율도 1% 안팎에 불과한 실정이다(삼성경제연구소 추정) .

하지만 벤처기업 수가 1년만에 두배 이상 늘어났고 인터넷 이용자수가 7백만명선에 육박할 정도로 급증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벤처기업의 신장세는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정부는 벤처기업 수가 2002년에 2만개로, 2006년에는 4만2천개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한다.
벤처의 GDP 비중도 2002년에는 6%까지 올라갈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연구원 이덕희 박사는 "젊은 패기로 똘똘 뭉친 벤처기업의 마인드가 기존 업체와 아주 다른 점이 경쟁력의 원천" 이라면서 "급속 성장을 해온 우리 경제의 패턴에 비춰볼 때 벤처기업의 성장 역시 빠르게 진행되면서 2000년대 경제성장의 견인차가 될 것" 이라고 진단했다.
코스닥 시장의 급성장 또한 벤처 성장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지난해 말 3백31개 기업이 등록해 시가총액이 7조9천억원에 불과하던 코스닥 시장이 지난 15일 현재 4백17개사 등록에 시가총액은 67조원으로 불어났다.
불과 1년사이 시가총액 기준 8.5배로 성장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정호 박사는 "초기에는 벤처기업들이 담보가 부족해 필요한 자금을 대출받는 데 애를 먹었다" 면서 "올들어 코스닥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건전한 투자자본을 끌어쓸 수 있는 선순환구조가 만들어져 벤처 성장을 촉진하고 있다" 고 분석했다.

두루넷과 미래산업의 미국 나스닥시장 진출 성공은 한국 벤처기업의 가능성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사례다.
코스닥 증권 관계자는 "현재 50여개 업체가 나스닥 진출을 추진하고 있으며 내년 중 적어도 10개 정도가 상장될 가능성이 크다" 고 말했다.

벤처산업이 명실상부한 한국 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이 많다.

코스닥 등록과 정부 혜택만 노리는 사이비 벤처기업이 적지 않고
정책소관이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어 중구난방식이며
나스닥에 진출한 이스라엘 기업이 86개나 되는데 비해 한국은 2곳에 머무르는 등 아직 우물안 개구리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벤처 지정요건과 코스닥 등록 기준을 강화하고 실리콘 밸리에 정보협력센터를 설립하는 한편 나스닥 상장을 지원해 벤처기업의 국제화를 유도할 방침이다.

정부의 벤처정책 가운데 바뀌어야 할 부분도 많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 홍동표 연구위원은 "일정규모 이상의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 면서 "일선 학교 교사의 정보화를 지원하고 학교에 컴퓨터를 더 보급하며 인터넷 인구를 확산시키는 등 인프라(하부구조) 를 구축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완표 수석연구원은 ▶변화를 따라잡기 위한 규제철폐▶교육제도 개혁을 통한 인력 양성 등이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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