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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세계 최고 팔로어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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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우리는 “리더십이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이의를 달 이유가 없다. 리더의 자질과 조건, 사고방식, 훈련방법에 관해 수많은 연구결과가 쏟아졌다. 몇천 년 된 고전부터 엊그제 나온 신간까지, 리더를 주제로 한 책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리더는 단 한 명이다. 한 사회나 조직의 구성원 수가 n이라면 리더는 1명이다. 나머지, 즉 n-1은 싫든 좋든 리더를 따르는 자, 팔로어(follower)다. 절대 다수다. 리더가 되지 못하면 가만히만 있어도 팔로어에 속하겠지만 좋은 팔로어, ‘유능한 팔로어’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리더십 못지않게 팔로어십이 중요한 이유다.

 사상 최악의 대지진에 맞닥뜨린 일본 사회를 보면서 새삼 팔로어십의 위력을 느꼈다. 일본은 세계 최고의 팔로어십을 갖춘 나라다. 성숙한 시민의식과 무서울 정도의 인내력, 일 하는 사람 발목 잡지 않고 진득하게 기다리는 시민들로 가득한 나라가 일본이다. 바보라서 참고 기다리는 게 아니다. 공동체 전체가 잘 돼서 결국 나에게도 이익이 돌아오길 바라는 장기적 안목에서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자칫하면 이런 모습을 ‘양들의 침묵’으로 착각하기 쉽다. 일본 정치가들도 그런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양들이 침묵하는 곁에서 정치인들이 자기들끼리 ‘놀고’ 있다. 한국에선 국민을 호랑이에 비유한다. 일본 정치인들이 양떼 곁에서 놀고 있다면, 한국 정치인들은 호랑이에게 아부하기에 급급하다. 나아가 이 호랑이는 자주 으르렁거린다. 잦게 분노하고, 분노끼리 서로 충돌하기 일쑤다. 그러나 오래 침묵하다 폭발하는 양의 분노는 가공할 정도다. 분노끼리 부딪치는 법이 없다. 한 방향으로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움직인다. 양질의 팔로어십이 큰 흐름을 이룰 때 리더십이 여기에 올라타면 사태를 걷잡을 수 없다. 변화의 폭과 깊이는 측정하기조차 어려워진다. 리더 그룹의 지혜가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하는 국면이다. “빨간 신호라도 함께라면 무섭지 않아”가 된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역사적으로 일본 사회의 큰 변화는 이런 흐름을 탔다. 양들이 떼지어 군국주의에 물들거나, 세계 무역전쟁의 일류 전사로 활약했다.

 이번 동(東)일본 대지진이 일본인의 팔로어십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수십, 수백 구의 시신이 묻히거나 떠다니는 묵시록적 비극 앞에서 사태 이후 이야기를 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분명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간 나오토 총리는 대지진이 준 ‘정치 휴전’ 덕분에 재일 한국인으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은 스캔들 파문에서는 일단 한숨을 돌렸다.

그는 헬리콥터를 타고 후쿠시마·미야기 현 참사 현장을 도는 등 정력적으로 사태 수습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유일의 원자탄 피폭국인 일본인들이 본능적으로 경기를 일으키는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이어지고 있어 간 총리가 앞으로도 점수를 딸지는 미지수다. 아니, 이미 일본 정치는 중의원 해산, 총선거라는 고식적 해결책으로는 때가 늦었는지 모른다. 세계 최고의 팔로어십을 감당하지 못하는 약체 리더십 때문이다.

 일본에서 자주 얘기되는 ‘제3의 개국’에 대지진이 얼마나 작용할지 관심이다. 제1의 개국은 페리 미 제독의 ‘흑선(黑船)’ 충격에 이은 메이지 유신, 제2의 개국은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은 경제 부흥이었다. 둘 다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개국의 기폭제였다. 이번에는 자연으로부터의 충격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제3의 개국을 추구해야 할 상황이 된 때로부터 이미 10년이 흘렀다. 그 사이 개국은 고사하고 3개의 버블이 붕괴됐다. 정치 버블, 경제 버블, 그리고 사회의 버블이다”고 탄식했다(나카소네 야스히로 『보수의 유언』). 과연 일본의 전화위복은 가능한가.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도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