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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91)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단식, 개안수련 15

쌍안경을 건네받을 것도 없었다. 내가 엎드린 암벽과 높이가 거의 같아서 어느 곳보다 더 잘 들여다보이는 방이었다. 그녀는 지금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가 보았다. 슬립차림에 머리는 정수리로 올려 질끈 묶고 있었다. 성한 눈을 가진 것처럼 그녀는 익숙하게 화장대 앞으로 다가 앉았다. 실제의 그녀는 뒷모습이었지만 거울 속의 그녀는 앞모습이었다.
“경찰이…… 훔쳐보는 일, 이거 불법 아닌가…….”
쌍안경을 빼앗아오며 내가 중얼거렸다.
“풋, 우린 뭐 공범이잖아요, 또 친구이기도 하고.”
“친구는 무, 무슨…….”
“아저씨, 저 아가씨 좋아하죠? 맞죠? 눈빛 보면 다 알아요. 저 아가씨도 오래전에 여기 산 적이 있던데요. 이사장님은 그 무렵 저기 운악산, 특수부대 훈련장 부대장이었다가 예편했었고요. 두 사람, 그때부터 아는 사이였을까요?”
“…….”

나는 꼭대기층으로 쌍안경을 올려댔다.
이사장의 어두운 방엔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렇다면 명안전에 칩거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사장의 몸을 씻기고 있는 미소보살과 춤추며 노래하는 애기보살의 모습이 어른어른 눈앞을 스쳤다. 특히 노래하며 손을 까불거리는 애기보살을 본체만체 지나쳐와 단식원 건물이 있는 곳까지 느릿느릿 걸어 내려가던 미소보살의 곰 같은 뒷모습이 선연했다.
“이사장님 방은 뭐 하러 자꾸 봐요?”
“…….”
“이사장과 저 아가씨, 불순한 상상을 할 건 없어요. 백주사라면 혹 모를까. 오늘 알아낸 건데요, 이사장은 수류탄 오발사고로 예편했어요. 오늘 은밀히 선을 대서 수술기록까지 훑어봤는데요, 참 비극적인 일이었죠. 그게요, 그러니까, 수류탄이 바로 앞에서 터졌었나 봐요. 그 양반의 그것이 반이나 떨어져 나갔다니까. 페니스 말예요. 허우대는 멀쩡하지만 이사장님, 성불구예요.”
나는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남의 말에 반응도 하는 분이었네요.”

젊은 순경이 내 손에서 쌍안경을 가져가며 미소했다. 과연, 나도 아직 놀랄 수 있는 인간이었다. 처음 제석궁에 갔던 날, 나를 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 준 M자머리가 무심코 내뱉다가 황급히 수습하려 했던 한마디 말이 나의 머릿속에서 파팟, 불을 켰다. 애기보살의 아버지인 키 작은 남자가 세상에 대고 ‘이사장님이 제 마누라와 딸을 빼앗아갔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할 때였다. “암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지. 이가 있어야 뭘 어떻게…….”라고, 그때 분명히 M자머리가 말했었던 게 기억났다. 그렇다면 M자머리가 지칭한 ‘이’란 바로 페니스였다. 젊은 순경이 병원기록까지 뒤졌다면 사실일 터였다. 애기보살을 이사장의 품에 남겨두고 명안전을 나가던 미소보살의 굽은 등에 짊어져 있던 것도 어쩌면 그것일는지 몰랐다. 미소보살 역시 다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내가 좋은 정보를 줬으니 나도 하나 물어봅시다.”
젊은 순경이 말했고,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한밤중에요, 아저씨 어디 갔었는지 말해줘요.”
“며칠 전에?”
“노과장 장례를 치른 날, 늦게요. 시치미 뗄 건 없어요. 아저씨가 나가는 걸 보고 금방 따라 나왔더니, 산으로 안 가고 마을로 내려가더라고요. 곧 택시를 탔고요. 밤중에 황급히 택시를 타고 간다? 아저씨가? 하도 이상해 나도 택시로 뒤쫓았는데, 뭐 솔직히 말하자면 터널 넘어가서 금방 놓치고 말았어요. 설마 택시로 드라이브를 했다고 말하진 않겠지요?”
“아하, 그러니까 그날…….”
이럴 때 나의 머리는 평소와 달리 기민하게 움직였다.
“복, 복통이 나서…… 병원에 좀…….”
“어느 병원요?”
“뭐 그것까지 말해야 되나, 친구라면서?”
나는 그의 시선을 똑바로 받으며 볼멘소리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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