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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가 있을 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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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호 04면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 207x209.5cm, 패널에 유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오늘은 내 자랑부터 해야겠다. 내 책꽂이에는 에른스트 곰브리치(1909~2001)가 지은 『서양미술사』 세 권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하나는 예경출판사에서 1997년 나온 한국어 책이고, 다른 하나는 1998년 모스크바에서 출판된 러시아어 책이다. 또 다른 한 권이 정말 자랑할 만한 것인데, 1950년도에 영국 파이든사가 발행한 영어 초판본이다. 출판된 지 60년이 넘은 이 책은 손때가 묻어 표지가 누렇게 변했다. 뉴욕에서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는 작가 변종곤 선생에게 선물로 받은 것이다. 앞 장에 쓰인 사인들을 보건대 적어도 변 선생이 네 번째 주인이고, 내가 다섯 번째 주인이다. 앞선 소장자들이 그랬듯 나도 자랑스럽게 내 이름을 썼다.

이진숙의 ART BOOK 깊이읽기 <11> E.H.곰브리치의『서양미술사』

여섯 번째 주인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시 미술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이 책을 소중하게 다룰 사람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가장 좋은 서양미술사 개론서가 뭐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꼽는다. 미술사 공부에 관한 한 내게는 첫사랑 같은 책이기도 하거니와, 그 이후로도 더 나은 미술사 개론서를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68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과 작은 활자가 주눅들게 만들기도 하지만, 읽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100쪽, 200쪽을 훌훌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첫 발행 이래 30개국 언어로 번역돼 수백만 권이 팔린 미술 서적계의 신화적인 책이다.

이 신화의 원동력은 ‘이야기의 힘’이다. 원시미술부터 시작되는 긴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굽이굽이 넘어간다. 딱딱한 연대기와 사조별 분류에 의존하지 않는 곰브리치의 독특한 방법론 덕분이다. “1888년 겨울, 쇠라가 파리에서 주목을 끌고 있고 세잔은 엑스에 은거하며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 때, 젊고 성실한 한 네덜란드 화가가 남국의 강렬한 햇살과 색채를 찾아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로 왔다. 그가 바로 빈센트 반 고흐다”라는 식의 서술은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독자를 몰입시킨다.

이 책은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런 열린 태도는 각 나라와 각 시대의 다양한 미술 현상을 바라볼 때 대단한 장점으로 작용한다. 문화 간의 차이만 존재할 뿐 차별과 서열화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아프리카 원시 부족 미술이 서양의 미술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말이다. 다만 다른 미적인 가치를 가진 다른 미술품들일 뿐이다.

예술의 장르와 방법 형식에 제약을 두지 않는 이러한 입장은 미래를 향해서도 열려 있다. 자신의 예술적 과제에 맞추어 각종 미디어 아트 등 새로운 매체를 수용하는 미술가들의 존재가 적극적으로 용인될 수 있다. “미술의 모든 역사는 기술적인 숙련에 관한 진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 곰브리치의 기본적인 태도다.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를 곰브리치는 ‘아는 것’과 ‘보는 것’의 변증법적인 발전으로 기술하고 있다. 미술은 처음부터 독자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집단의 주술이나 종교 등 다른 목적에 종속돼 있었다. 그러므로 원시 미술과 이집트 미술에서는 인간이 ‘아는 것’을 표현해 내는 명확성이 가장 중요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눈으로 ‘보는 것’을 배워나갔다. 다른 목적에서 벗어난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찬란한 고대미술이 펼쳐졌다.

그러나 종교가 지배적이었던 중세에는 다시 ‘아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 르네상스 이후로는 ‘보는 것’이 다시금 중요한 문제가 됐다.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서술은 이 책의 가장 매혹적인 대목이다. 눈으로 ‘보는 것’이라는 관념이 극대화된 것이 인상주의다. 그러나 세잔은 인상주의자들의 화면에 등장하는 시각적인 현상의 무질서함을 극복하고 ‘아는 것’과 ‘보는 것’을 통합하려 했고, 이러한 입장은 피카소의 입체주의로 발전해 나간다고 책은 정리한다.

이렇게 미술 내적인 발전논리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가운데에도 각각의 미술들이 발전할 수 있었던 사회문화상이 명료하게 이해되는 것은 저자가 모든 역사적인 배경을 꿰뚫어 글 속에 완전히 녹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럽 교회의 장식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교회를 바라보며 중세 유럽인들이 느꼈을 종교적 경외감을 상기하라고 말한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좋은 미술서적은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품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1950년 처음 발행된 이 책은 20세기 초반까지의 미술사가 주 내용이다. 그중에서도 17세기 이전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20세기 미술에 관해서는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 또 동양미술의 대부분이 빠져 있고, 러시아를 포함한 옛 사회주의권 국가의 미술을 다루고 있지 않다. 책의 원제가 ‘The Story of Art’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서양미술사’로 번역된 이유다. 또한 저자의 조국인 영국의 미술을 다른 미술사 서적보다 많이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앞서 열거한 여러 탁월한 장점에 비하면 이런 문제들은 사소한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내게 미술사 서술의 또 다른 측면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진실 말이다. 처음 미국의 현대미술관(MoMA)에 갔을 때 나는 감탄을 연발했다. 책에서 본 모든 작품이 거기에 있었으니, 현대미술의 교과서 같은 미술관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미술사가 대부분 미국 미술을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번 다룬 『예술과 그 가치』의 저자 매튜 키이란 역시 영국 학자인데, 그는 “영국미술사를 기술하고 나면 미국에서 일어난 발전의 못난 사촌동생쯤으로 여겨지는 지적인 유행 좇기”를 통탄했다. 자국의 역사 전체가 홀대받고 있는 나라 한국. 한국 미술은 이러한 지적인 유행 좇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문득 서구의 학자들이 우리에게 말을 한다. 너희의 길을 가라고. 너희의 역사를 너희가 기록해야 한다고. 작가들이 외국에서 인정받은 후에나 덩달아 인정하는 몰지각한 일은 그만 하라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작가를 기록해서 알리라고.


이진숙씨는 러시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미술작품에서 느낀 감동을 전하는 일을 업으로 여긴다.『러시아 미술사』『미술의 빅뱅』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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