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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추적] 이근안 자수의 미스터리

중앙일보

입력

10년10개월간의 도피생활 끝에 자수한 이근안 전 경감. 오랜 도피기간과 ‘고문 기술자’라는 별칭답게 그는 자수 후에도 여전히 세간의 관심인물이 돼 있다. 자수 후 검찰조사를 받고 있는 이근안 전 경감과 관련해서는 아직 풀리지 않는 의혹들이 여럿 남아 있다. 검찰 수사와 향후의 재판 과정에서 답이 제시돼야 할 이근안 관련 의혹을 정리해 본다. [편집자]

이근안(61)
씨가 잠적한 것은 경기도경 공안분실장으로 재직중이던 지난 8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이씨는 85년 9월, 서울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민청련 의장을 맡고 있던 재야인사 김근태(현 국민회의 국회의원)
씨를 조사한 적이 있다. 이때 이근안씨는 김씨를 상대로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추궁하면서 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를 했다.

구속 상태의 김근태씨는 자신에 대한 고문 사실을 변호인을 통해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이 이를 무혐의 처리하자 김씨는 87년 1월,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부당하다며 법원 직권의 재판 회부를 청하는 재정신청을 서울고등법원에 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근태씨는 전기고문 등을 동원해 자신에게 가혹행위를 한 이씨의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발장에도 이씨는 ‘신원미상의 고문경관’으로 적시돼 있었다.

그러나 ‘얼굴 없는 고문 기술자’로 숨어 지내던 이근안씨의 정체는 88년 12월 한 신문을 통해 일반에 폭로되고 만다. 이씨는 자신의 얼굴 사진과 실명(實名)
이 신문에 실린 그날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곧바로 잠적해 버렸다.

이후 ‘이근안’이라는 이름 석자는 권위주의 시절 인권부재(人權不在)
의 상징처럼 일컬어져 왔다. 매년 연말 이씨가 잠적한 날이 다가오면 언론은 ‘이근안, 죽었나 살았나’‘이근안, 안잡나 못잡나’ 등의 연례행사식 보도를 해왔다.

도피 이후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아 숱한 의혹과 추측을 불러일으켰던 그 이근안씨가 ‘마침내’ 모습을 나타냈다. 지난 10월28일 밤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 자수한 그는 수배 기간 내내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국내에 은신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동안 유력하게 나돌던 ‘해외도피설’‘성형수술 후 타인 위장설’ 등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배기간의 대부분을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숨어 지냈다며 무표정한 얼굴로 나타난 그의 자수는, 한편으로는 그동안 나돌던 소문과 의혹을 해소시켜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오랜 도피생활과 전격적인 자수에 버금가는 또 다른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이근안 전 경감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의혹은 느닷없는 자수의 배경에서부터 시작된다. ‘왜 이 시점에 자수를 결심하게 됐느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씨는 검찰 진술에서 ▶오랜 도피생활에 지쳤고 ▶납북귀환 어부인 김성학씨 수사에 함께 가담했던 동료 경찰들이 재판을 받는 데 대해 죄책감을 느꼈으며 ▶동료들이 재판에서 비교적 가벼운 형을 선고받는 것을 보고 자수를 결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밝힌 자수동기는 전후 사정을 조금만 파고들면 설득력이 상당히 약해진다.

◇ 자수 동기부터 석연찮은 구석 많아

우선 ‘오랜 도피생활에 지쳤다’는 대목부터 보자. 지난해 환갑을 넘긴 나이를 감안하면 그 오랜 세월을 도망자로 지내면서 상당한 심적, 육체적 부담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1, 2년도 아닌 10년이 넘는 세월을 용케도 숨어 지내다 뒤늦게 ‘도피생활에 지쳤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도망자의 심정에서는 단 하루라도 지치지 않는 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씨의 자수 동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그가 ‘김근태씨에 대한 고문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얘기하는 쪽이 훨씬 솔직하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이씨는 김근태씨가 낸 고문 고발사건의 공소시효가 지난 8월15일로 끝났기 때문에 고문한 사실이 객관적으로 인정되더라도 형사책임은 면하게 됐다.

이씨가 얘기했다는 ‘동료 경찰들이 재판을 받는 데 대한 죄책감’도 이 시점에서 그를 자수하도록 만들기에는 명분이 약한 것으로 지적된다.
이근안씨는 지난 85년 12월2일부터 72일간 경기도경 대공분실에서 납북귀환 어부 출신인 김성학(51)
씨를 조사한 적이 있다. 이때 이씨와 동료 경찰관들은 김씨에게 “북한에서 돌아오면서 받은 지령을 자백하라”며 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를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의 조사를 통해 김성학씨는 국가보안법상의 간첩죄 및 반국가단체 찬양고무죄로 검찰에 송치됐다. 그러나 이근안 경감팀이 조사한 김씨에 대한 혐의사실 중 간첩죄는 검찰의 기소 과정에서 이미 무혐의 처리됐다. 김씨의 자백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검사가 인정한 것이었다. 검찰이 기소한 반국가단체 찬양고무죄는 재판 과정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도 설득력 없어

김씨에 대한 이때의 가혹행위로 인해 이근안씨와 그의 동료 경찰들은 검찰고발, 재정신청 등을 거쳐 지난 1월 정식재판에 회부됐다. 김성학씨가 사건 발생 당시 거주했던 경기도 광주군(현재의 하남시)
을 관할하는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에서 열린 이 재판은 이근안씨가 도피중인 가운데 지난 10월21일 1심이 끝났다. 이근안씨가 말한 동료 경찰들이란 자신과 함께 기소된 6명의 전·현직 경찰들을 말한다.
이들을 두고 이씨가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은 ‘상관으로서 부하들이 재판받는 데 도의적 책임을 느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재판 진행 과정이나 경찰관들의 법정진술 등을 따져 보면 ‘죄책감’ 운운하는 이씨의 얘기에도 모순이 적지 않다.

이 재판이 시작된 것은 지난 1월이었다. 서울고등법원이 김씨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재판이 확정된 것은 지난해 11월이었다. 이씨가 진정으로 부하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대공분실장으로서의 법적, 도의적 책임을 느꼈다면, 그는 재판이 결정되는 그 시점에 죄책감을 느껴 자수를 결심해야 앞뒤가 맞다.

그러나 이씨는 재판이 시작된 지 10개월이 지나 자신의 부하들에 대한 1심 형량이 결정되는 것을 보고 나서 ‘죄책감’ 때문에 자수했다고 얘기했다. 진작 재판정에 출두해 ‘모든 것이 내 책임이며 부하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했을 때 그가 말한 ‘죄책감’은 진정한 공감을 불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1심 판결이 내려지기까지의 재판 과정을 살펴보면, 이씨가 과연 ‘죄책감’을 느낄 구석이 있었을지 의문이 간다. 법정 상황을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었다면 이씨는 부하들에게 ‘죄책감’보다 ‘배신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더 컸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씨의 지휘를 받던 6명의 경찰관들은 김성학씨에 대한 수사에서 가혹행위가 일절 없었다면서 독직폭행(瀆職暴行)
혐의를 부인으로 일관했다. 이들은 저녁 9시가 되면 정상적으로 잠을 재우는 등 인간적 대우를 해가며 조사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이들의 가혹행위는 지난해 서울고등법원의 재정신청 결정 때부터 이미 인정된 것이었다.

피고인석에 선 경찰들이 유일하게 인정한 불법사실은 ‘결과적으로 김씨를 영장 없이 불법감금한 사실’뿐이었다. 이들은 김성학씨를 구속영장 없이 불법체포한 사실과 관련해서도 “이근안 실장이 따로 영장을 받아 놓은 것으로 알았다”는 납득하기 힘든 주장을 내세웠다.

이들은 자신들의 혐의사실을 부인하면서, 재판장이나 공소유지 담당 변호사의 추궁이 있으면 상관이었던 이근안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데 급급했다. “모든 것은 당시 책임자로 있던 이근안 실장이 지시하고 지휘한 것이며, 우리는 그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는 진술로 일관했다. “모든 것을 우리가 알아서 했으며, 이근안 실장은 전혀 잘못이 없다”고 했다면 모를까,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내세우며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했던 부하들에게 이씨가 과연 ‘죄책감’을 느꼈을지 의문이다.

◇ ‘비교적 낮은 형’ 선고받는 것 보고 자수 결심?

이씨가 말한 ‘동료 경찰들에게 선고된 낮은 형량’은 앞서의 두 가지보다 상대적으로 설득력 있는 자수 동기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성남지원 형사합의부가 6명의 경찰관들에게 선고한 형량은 징역 2년에서 1년 사이였다. 수사에 적극 가담했던 3명이 법정구속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형량이 이씨에게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는 느낌을 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이씨가 ‘수사 책임자임을 감안하면 부하들보다 1, 2년 더 살면 될 것’이라거나 ‘자수하면 선처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개연성도 높다.

그러나 이근안씨가 ‘비교적 가벼운 처벌’이라고 판단한 1심의 형량은 아직 최종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1심 형량에 불과하다. 항소심에서 더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사건의 공소유지를 맡고 있는 백오현 변호사가 6명의 피고인 전원을 상대로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함으로써 2심 형량이 더 높아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형사소송법상 검찰이 항소하지 않는 가운데 피고인만 항소하면 2심 재판부는 1심보다 높은 형을 선고할 수 없다. 그러나 형량이나 법 적용에 이의를 제기하면 검찰이 항소할 경우, 2심 재판부는 1심보다 높은 형을 선고할 수 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근안씨가 실제로 동료 경찰관들에 대한 1심 형량을 보고 자신도 그리 무겁지 않은 형을 선고받을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착각’이거나 ‘지나친 아전인수격 해석’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씨는 당시의 수사를 지시, 감독한 책임자다. 이미 1심을 마친 경찰들이 ‘종범’이라면 그는 ‘주범’이라는 얘기다. 그에게 고문을 지시하거나 묵인 또는 방조한 사람이 따로 있지 않는 한 이근안씨는 피의사실상의 핵심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 동료 경찰들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떠넘기듯 법정 진술을 해 놓은 것도 이씨의 형량을 높게 할 근거가 될 전망이다.

자수 이후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각종 고문 의혹이 새롭게 제기되는 것도 이씨에게는 부담이 될 것이다. 비록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상습적으로 고문행위를 저지른 사실’은 앞으로 있을 이씨 자신의 재판에서 형량이 결정될 때 ‘상당한 고려사항’이 될 여지가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이씨는 국내에 있으면서, 그것도 재판이 열린다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1심이 종료되기까지 법정에 출두하지 않았던 데 대한 책임도 져야 할 입장이다. 그러한 불출석이 다른 사건의 공소시효를 피하기 위해서였거나, 해당 사건의 재판 결과를 기다려 보기 위한 고의적인 것이었다면 그는 죄질을 더욱 의심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씨는 다른 재판부도 아닌 “비교적 가벼운 형을 선고한 것 같더라”고 스스로 ‘평가’한 바로 그 재판부의 심판을 받게 된다. 따라서 재판에 출석하지 않고 도피했던 ‘주범’으로부터 그러한 평가를 받은 재판부가 과연 어떠한 심기 아래 이씨를 심판할지도 관심이다.

이근안 전 경감에게 적용된 혐의는 불법감금과 독직폭행 두가지다.
형법에 정해진 최고 형량은 불법감금이 7년, 독직폭행이 5년이다.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죄목으로 기소된 경합범에 대한 형량을 정할 때는 상대적으로 높은 쪽 형량을 기준으로 하면서, 그 최고형량의 절반까지 가중선고할 수 있다.

따라서 이씨에게는 두가지 죄목 가운데 형량이 높은 불법감금죄의 7년을 적용하면서, 그 절반인 3년6개월을 더한 10년6개월이 법정 최고형이 된다. 여기에다 10년 이하의 자격정지가 병과된다. 어느 모로 보나 그가 얘기한 ‘낮은 형량’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 밤중에 성남까지 가 엉뚱한 데서 자수?

이근안 전 경감의 갑작스런 자수에 의아해하는 사람들은 그의 자수 과정에도 단순히 ‘착각’이라고 넘길 수만은 없는 석연찮은 대목이 많다고 주장한다. 30년간 경찰 생활을 하고, 10년 넘는 세월을 도망자로 지낸 사람이 마침내 내린 ‘결단’이라고 보기에는 이씨의 자수 과정은 너무도 엉성했다는 것이다.

이씨가 밤 9시가 임박해 찾아가 자수한 곳은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 당직실이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씨는 전혀 엉뚱한 곳에 자수한 것이었다.
일부 언론은 이씨가 성남지청에 자수한 것을 놓고 ‘김성학씨의 재정신청 사건이 성남지원에서 열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성남지청은 법적으로 이씨가 직접 자수할 데가 아니었다.

이근안씨가 신문지상에 자신의 이름과 얼굴 사진이 공개된 직후인 89년 1월6일 서울지검 강력부는 이씨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체포감금치상 혐의로 전국에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이 수배령은 이씨가 자수하던 시점까지도 유효했다.
따라서 이씨가 자수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은 서울지검이었다. 서울지검으로 바로 가기가 여의치 않았다면 서울 시내의 각 지청(支廳)
도 있다. 검찰의 수사 지휘를 받는 각 경찰서와 파출소도 있었다.

특히 경찰은 이씨가 30년 이상 몸담았던 ‘친정’이었다. 그가 경찰에 자수했더라면 그동안 ‘안잡느냐, 못잡느냐’하는 질책을 받아온 경찰로서는 마지막 체면치레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씨는 서울지검과 경찰이 아닌 성남지청을 자수처로 택했다. 이 때문에 성남지청은 느닷없이 걸어들어온 이씨를 한밤중에 서울지검으로 압송하는 부산을 떨어야 했다. 신문과 방송은 성남과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를 오가며 덩달아 뛰어야 했다.

이씨가 어떠한 사정이나 판단에서 서울보다 성남을 택했다면, 그는 검찰 대신 법원을 찾아갔어야 옳았다. 성남지원 형사합의부는 지난 1월부터 시작된 김성학씨 재정신청사건과 관련해 법정에 출두하지 않는 이씨의 신병확보 즉시 재판 개시를 의미하는 ‘변론분리’조치를 내려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씨가 해외도피를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자, 서울지검은 김성학씨 재정신청 담당 재판부에 ‘협조요청’을 했고, 담당 재판장인 구만회 판사가 직권으로 영장을 발부해 이씨를 구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법적 요건을 감안하면 이씨는 담당 재판부에 전화를 걸어 출두(또는 자수)
의사를 밝히거나 직접 담당 판사를 찾아가는 것이 옳았다. 판사가 퇴근하고 없을 시간이었다면 법원 당직실로 갈 수도 있었다.

법 해석상 이 전 경감이 법원 말고도 또 찾아가 자수 절차를 밟을 수 있는 곳이 한곳 더 있었다. 바로 사건의 검찰(공소유지를 담당)
역할을 맡고 있는 백오현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백변호사 사무실은 이씨가 찾아간 성남지청 바로 옆에 있다.
실제로 이씨가 자수한 10월28일 저녁, 외부 행사에 참석하고 늦게 귀가한 백변호사는 ‘이근안이 성남에서 자수했다’는 뉴스를 듣고 ‘혹시 내 사무실로 찾아오지나 않았었나’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씨의 자수 과정은 단순히 ‘성남에서 재판이 열리고 있으니 성남 검찰에 자수한 것’으로 생각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도 많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씨가 서울 용두동 자택이 아니라 성남에서 가까운 곳 어딘가에 숨어지냈다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그가 집에서 머무르다 자수를 앞두고 성남 인근에서 누군가와 자신의 신변문제와 관련해 상의했거나 조언을 받았을 가능성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밤에 그가 그간 은신해온 서울 용두동 집에서 한참 거리가 떨어져 있는 성남지청에 불쑥 모습을 나타낸 배경이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수 당일 이씨의 행적에 대한 객관적인 조사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자수 전후 그와 동행한 사람은 없는지, 부득이한 사정에서 성남까지 갔다면 언제쯤 길을 나서서 어떤 교통편을 이용했는지 등만 따져도 ‘밤중 자수’에 따른 의혹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박종주 월간중앙 기자
월간중앙(http://win.joongang.co.kr) 제 289호 199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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