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 출연 계기로 다시 무대 서는 가수 이장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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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칸 짜리 집을 짓고 일년의 절반을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이장희씨는 ‘울릉 天國(천국)’ 팻말을 내세운 더덕 밭 앞에 나와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곡을 죽기 전에 쓰고 싶다”고 말했다. [울릉도=조문규 기자]


동쪽 먼 바다에 솟아난 울릉도는 간다고 갈 수 있는 섬이 아니다. 하늘이 도와줘야 뱃길이 열리는, 낯을 가리는 땅이다. 전직 가수 이장희(64)가 첫눈에 반해 여생을 묻겠다고 이 오지를 찾아 들었을 때, 낯가림이 좀 있는 그는 자신을 닮은 자연 앞에서 흡족했다.

‘물 위에 산이 떠있는 곳이라니.’ 말년을 하와이에서 보내겠다는 계획을 버린 그가 100년 된 옛 집을 구석구석 고치고 더덕 밭을 고른 지 십 여년. 2004년부터 한 해 절반 가까이를 울릉도 북면 평리 일자집에서 보내는 그는 “한 번 들어오면 나가기가 싫어서요”라며 “으하하하하하, 파도 잘 살피고 오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인사했다. 1970년대 음악 감상실 ‘세시봉’의 윤형주·송창식·김세환의 친구이자 조영남의 후배이며 김민기의 선배인 그는 “결국 다시 음악으로 돌아오다니…” 감회에 젖었다.

-다른 콘서트 초대는 다 물리치시고 오는 30일 학전 20주년 기념 음악회 ‘김민기의 오래된 친구들’에만 출연하신다고요.

 “오랜만에 텔레비전에 나가 ‘세시봉’ 친구들을 만나고 노래를 하고 보니 ‘내 원래 자리가 여기였는데’ 하는 향수가 밀려왔어요. 억지로 그만둔 셈이니까. 그래서 키보드 놓고 기타 튕기며 천천히 옛날로 거슬러 오르는 중입니다만….”

-유유자적 울릉도에서 신선놀음 하시는 걸로 알려졌는데 어떻게 보내세요.

 “글쎄 그게 영남이 형이 엉뚱한 소리를 해서, 으하하하. 제가 환갑잔치를 한다니까 친구들이 ‘야, 장희야 우리가 선물을 하고 싶은데 뭘 해줄까’ 해서 제가 교양서적이나 사와라 했거든요. 그 중 한 권이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철학책이었는데 읽다 보니 갑자기 전율이 이는 거예요. 젊을 때는 철학이라면 골치 아프고 딱딱한 걸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쏙쏙 들어오고 흥미가 일어요. 아침에 일어나 아이패드로 인터넷 체크하고 월 스트리트 저널하고 LA타임스 훑고. 제가 어쨌든 한때 언론계에 있었잖아요. 그리고 나선 기타 좀 치고 DVD로 된 철학강의를 오래 들어요. 산으로 낸 산책로를 매일 걷죠. 단순해요.”

-콧수염을 깎고 머리를 밀어버려서 옛날 이장희를 못 알아봤다는 분들도 있어요.

 “제가 니힐(염세주의)이 좀 있어요. 내가 이장희란 걸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콧수염은 사고로 난 상처 때문에 길렀는데 늙으니 상처가 없어져서 자연스레 깎았죠. 머리는 50대 되면서 밀었는데 이발소 가서 기다리는 게 바보 같아서요. 열흘에 한 번쯤 전기면도기로 정리하고 나면 해방감이 들어 기분이 좋아요.”

-일찌감치 은퇴하고 여행으로 소일하는 그 자유와 능력을 부러워하시는 분이 많아요.

 “가끔 내가 왜 여기 와 있나 할 때가 있어요. 근데 좋아요. 따듯한 봄날, 김매고 있으면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싶어요. 속세는 다 허망하다, 인간이 자연에서 태어났으니 원래 자리로 돌아와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게 옳지, 넌 바른 길에 와 있는 거야, 크게 어긋나 사는 건 아니야 싶죠.”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진정한 남자’라고들 하는데요.

 “제가 엄청난 부자로 알려졌는데, 으하하하하, 아니에요. 물론 가난한 사람도 아니고요. 은퇴 기획을 일찌감치 했을 뿐이죠. 한 달에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뭘 어떻게 하고 살 것인지가 관건이죠. 전 여행을 잘 할 줄 알고, 하루를 구성할 줄 압니다. 저에게 만족하면서요. 제가 캘리포니아 ‘데스 밸리’를 수십 번 갔는데 깨끗하고 순수한 땅입니다. 그런 황무지가 제 마음으로 들어오니까 딴 데 돈 안 쓰고 거기를 또 갑니다. 자기를 진정 행복하게 해주는 좋은 취미를 미리 깊이 길러보기, 시간을 쪼개 마음이 끌리는 곳을 다녀보기, 이런 준비가 지금 당장 필요해요. 나중에요? 사람이 100년을 산다 한들 몇 십 년 뒤를 누가 알 수 있나요. 다음이란 없어요. 지금 여기뿐이죠.”

-‘울릉 천국’이란 팻말이 재미있습니다.

 “으하하하, 그거 사실입니다. 집 바로 아래가 교회니까요. 교회 위에 있으니 천국이죠.”

 북면에서 유일한 남향집이라는 세 칸짜리 누옥에 석양빛이 기울었다. ‘장군바위’라 이름 붙였다는 집 앞 석봉이 보이는 창가에 앉은 그가 기타를 집어 들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이름 석 자인가.…철 없는 인생들에게 어찌 하란 말인가. 나를 알고 싶다, 무슨 까닭에….” 한 시대를 풍미한 자작곡 가수(singer song writer)를 다시 무대 위에서 보게 될 날이 멀지 않음일까, 기타가 디디딩 파도따라 울었다.

울릉도=정재숙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이장희=1947년 경기도 오산에서 태어나 서울중·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생물학과를 중퇴했다. 1971년 DJ 이종환씨가 권유해 노래 ‘겨울 이야기’로 가요계에 입문해 ‘그건 너’ ‘애인’ ‘나 당신에게 모두 드리리’ 등 히트곡을 낸 뒤 영화 ‘별들의 고향’ 음악을 맡으며 인기를 누렸다. 75년 ‘긴급조치’를 발동한 유신정권의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돼 활동정지를 당했고 자연스럽게 가수 생활을 접었다. 의류업체 운영으로 기반을 닦은 뒤 8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레스토랑을 운영하다가 89년 2월 ‘라디오 코리아’를 개국해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2003년 은퇴를 선언하면서 미리 터를 봐둔 울릉도로 내려가 혼자 살면서 서울·울릉도·LA를 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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