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양념간장에 달래, 젓갈에 미나리 … 향긋상큼한 봄맛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08호 10면

제철음식 이야기를 쓴 지도 꼭 1년이 됐다. 내가 전문 영역도 아닌 음식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시중에 나오는 음식 관련 책은 크게 두 가지 종류이고, 남녀 필자가 다른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남자 필자들이 쓴 책은 대개 전국 각지의 맛있는 집들을 찾아다니는 방식, 즉 전국 맛집 기행,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국 술안주 기행(!)쯤 된다. 그에 비해 여자 필자들이 쓴 책은 주로 레시피가 달린 요리법을 중심으로 일상적 반찬이나 간식, 손님 접대용 요리들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마지막 회> 철 만난 달래와 미나리

음식 책이 보여주는 남녀 성별 차이가 말해주는 바는 너무도 명확하다. 여자는 음식을 하고, 남자는 그걸 먹는다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아가 보면 여자들은 가족이나 그들이 초청하는 손님을 위해 음식을 하고, 남자들은 가족(대개는 아내일 것이다)이 해준 음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더 맛있는 음식과 술안주를 먹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럼 내 글은 어디에 속할까? 언뜻 보기에는 ‘음식 만드는 여자’의 글로 읽히는 것 같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 글은 요리법을 설명해주는 글이라기보다는, 내가 해 먹고 사는 음식에 대한 수필에 가깝다. 나는 음식 전문가가 아니고 평론가인 것은 맞지만 ‘음식’ 평론가는 아니다. 나는 내가 먹고 사는 음식에 대한 주관적 체험에 국한된 내용만을 쓸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음식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겁다. 내 전문 분야가 아니어서 그럴 것이다. 연극평론가이자 대중예술평론가인 나는, 연극을 보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가 노동을 하는 시간이다. 남들은 추억에 젖어 감동을 하면서 본 ‘세시봉’ 관련 프로그램 같은 것을 볼 때 나는 머리가 엄청나게 복잡해진다. 머릿속에서 복잡한 분석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가수들이 예전만큼 노래를 못 부르니, 텔레비전 앞에서 혼자(마치 남격합창단의 박칼린처럼) “플랫!” 하고 외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내가 음식 이야기만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해 먹는 것이 취미다. 그래서 나는 1년 동안 이 글을 편안하게 쓸 수 있었다.

“명색이 주부인데 음식 만들기가 취미? 노동이 아니고 취미?”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정말이다. 나에게 이건 취미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위해’ 음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내 글을 보고 “남편 분은 참 좋으시겠어요”라는 덕담을 하면 그다지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마치 내가 남편을 위해서만 음식을 하는 것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남편 입맛에 맞춘 음식을 하며 남편이 즐겁게 먹는 모습을 보면 즐겁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내가 ‘음식조리권(!)’을 남편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은,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 먹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위해 음식을 하고, 내가 즐거울 때 음식을 한다.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음식 만들기가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이어야 한다고. 그래야 그걸 함께 먹는 식구들도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흔히 남편들은 그것이 아내의 의무이니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엄마가 만든 옛 맛이 나지 않는다고, 왜 그걸 배워서 그대로 해주지 않느냐고 은근히 압력을 넣기도 한다. 그럴수록 아내에게 음식 만들기는 점점 하기 싫은 의무가 되고, 그렇게 만든 음식은 여자의 스트레스가 팍팍 들어간 나쁜 음식이 되어 버릴 것이다.
입맛의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없는 시간을 쪼개 음식을 만드는 나에게, 그래서 제철음식이 정말 중요하다. 계절의 흐름을 만끽하면서 음식을 맛보는 것, 그리 값비싼 재료가 아님에도 자연이 내려준 제철의 맛을 지니고 있는 것, 그래서 가장 간단한 조리법만으로도 감동스러운 맛을 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제철음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찾아온 봄 나는 시장에 나가 달래와 미나리를 샀다. 겨우내 마트에 고무줄로 묶어놓은 비닐하우스 달래와 미나리꽝에서 뽑아온 기다란 논미나리만 나왔었는데, 이제 봄이라고 보실보실한 흙이 묻어 있는 달래와 밭에서 뜯어온 연한 미나리 새 순이 눈에 띈다. ‘이런 횡재가 있나’ 하는 심정으로 냉큼 샀다.

제철음식은 가장 단순한 조리로, 재료의 맛을 만끽하는 게 가장 좋다. 싱그럽고 상큼한 맛으로 먹는 봄나물 같은 것은 더더구나 그렇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래 음식은, 달래 간장이다. 달래를 다듬어 깨끗이 씻어 썬 다음 간장, 고춧가루와 깨소금을 넣은 양념간장을 만드는 것이다. 간장은 집에서 담근 조선간장과 공장제 간장을 절반씩 섞어야 맛이 깔끔하다. 달래 양에 비해 간장의 양이 적어 거의 달래무침처럼 느껴질 정도가 되는 것이 좋다. 짭짤한 간장에 촉촉하게 잠겨 있는 달래를 젓가락으로 건져 따끈한 밥 위에 얹어 싹싹 비벼 입에 밀어 넣는다. 와, 상큼한 봄의 향기다.

미나리도 연하디 연한 것을 샀으므로, 날것으로 먹어야겠다 싶다. 어찌나 연하고 깨끗한지 다듬을 것도 없다. 깨끗이 씻어 그대로 상에 올리고, 옆에는 쌈장이나 젓갈을 함께 놓는다. 젓갈은 멸치생젓이나 갈치속젓에 마늘과 고춧가루 양념을 한 것이 미나리와 잘 어울린다. 손으로 미나리를 집어 젓갈에 쿡 찍어 입에 넣으니 짭짤한 젓갈 맛과 어우러진 향긋한 미나리 향이 입안에 가득하다.

이건 무슨 대단한 요리가 아니고, 손님 접대용으로 내놓을 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먹기에는 이것보다 더 편안하고 즐거운 음식이 있으랴. 모두 자연이 내게 내려준 즐거움이다. 1년 사계절, 아니 평생토록 이렇게 먹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