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시리즈를 마치며 (5) 끝·백선엽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연재를 마친 백선엽 장군의 모습이 정정하다. 요즘도 그는 책을 읽고 생각에 잠긴다. 그는 “자신과 의 싸움이 가장 길고 어려웠던 싸움”이라고 말했다. 전쟁의 참혹성을 기억하는 자만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최승식 기자]

길었던 연재가 끝났다. 중앙일보가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1년2개월 동안 펼친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남기고 싶은 이야기-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3년여의 전쟁 기억, 그리고 힘차게 일어선 대한민국의 역정을 그 안에 소중히 담았다. 회고를 마친 백 장군을 지난 3일 그의 전쟁기념관 사무실에서 만나 소감을 물었다.

“6·25전쟁은 국제전이었다 … 해양세력 미국의 힘 활용해 대륙세력 중국을 막아냈다”

-지녔던 기억을 이제 상당 부분 털어놓으셨습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시원합니다. 어느덧 세월이 60년 넘게 흘러 이제는 전쟁을 까맣게 잊어가고 있는 한국사회에 소중한 역사를 일깨웠다는 점에 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이제 나이도 들어 싸움을 하지 않는 게 도리지만, 이것도 역시 싸움이었어요. 옳게 역사를 기록하고, 많은 사람에게 그 내용을 더욱 알게 하는 과정이 모두 싸움이었습니다. 내 기억을 정리하는 기자와도 적잖은 신경전을 벌였잖습니까. 그게 다 싸움이지요.(웃음)”

-전쟁 회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뭡니까.

 “사실, 나는 큰일을 한 게 없어요. 그저 일선을 뛰어다니면서 수많은 대한민국의 장병들을 지휘한 것뿐입니다. 내 지휘를 받고 묵묵히, 앞의 적만 보면서 뛰어나가 돌아오지 않았던 그 많은 내 부하 장병들이 정말 큰 수고를 한 겁니다. 그리고 전선에서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적과 싸우다 부상한 사람들, 몸은 다치지 않았으나 치열하게 적을 맞아 싸웠던 전선의 장병들이 대단히 큰일을 한 겁니다. 나야 다 누리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장군도 아니었고, 남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일 계급장도 없었어요. 그들이 우리나라를 지킨 겁니다…. 나는 그 부하들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감사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겪은 60년 전의 전쟁이 지닌 의미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김일성 군대의 남침으로 시작해 처절한 동족상잔의 아픔을 남겼지만 대한민국은 결국 북한의 야욕을 막아냈고, 중공군과의 싸움에서도 결국 밀리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이 이 땅에 올라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세계 최강의 군대가 몰고 온 것은 미국, 더 나아가 서구의 문명이라고 봅니다. 1953년에 미국으로부터 얻어 낸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이제 세계적인 강국으로 떠오른 대한민국의 틀을 형성했다고 생각합니다.”

-미군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얻었습니까.

 “작게는 무기를 비롯한 장비, 중간으로는 그들의 전투력입니다. 크게는 그들의 시스템을 익혔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그 모든 과정에 담긴 저들의 문명이 우리의 눈에 들어왔고, 전쟁 후에는 미군이 몰고 온 문명적인 요소들이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골고루 이식 됐던 겁니다.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미국의 경제지원 등은 그를 촉진시킨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배우고 얻는 과정이 순탄했습니까.

 “아니죠. 미국의 주류를 형성하는 앵글로색슨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철저한 타산, 냉정한 저울질이 반드시 따릅니다. 그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처절하면서도 대담한 싸움이 없었다면 결코 우리가 끌어오기 어려운 조약이었습니다.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그들에게 지원을 얻어내는 일 역시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었어요. 그러나 그런 역정을 거쳐 한국은 미국과 결국 혈맹의 관계를 맺은 겁니다.”

-6·25 전쟁의 개념을 새롭게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중공군과의 싸움 말이죠? 맞습니다. 3년 동안 벌어진 전쟁에서 김일성 군대의 역할은 초반 3개월에 머물렀습니다. 물론 그들이 전쟁을 촉발해 이 땅에 커다란 비극을 불러들였죠. 그러나 숫자로 말하자면 북한군은 2입니다. 적의 역량 가운데 나머지 8은 중공군으로부터 왔습니다. 그 점에서 보면 우리는 60년 전, 해양을 상징하는 미국의 힘을 활용해 대륙으로부터 몰려든 중국을 막아낸 겁니다. ”

-지금의 중국에 대한 생각은 뭡니까.

 “싸움터에서 지켜봤던 중공군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전략과 전술이 늘 흐르는 물과 같았습니다. 요즘의 중국도 마찬가집니다. 같은 공산주의를 해도 중국은 유연합니다. 왕조적이면서, 교조적이어서 백성을 굶게 하는 북한의 공산주의와는 다르죠. 중국은 거대한 나라입니다. 훌륭한 동반자가 될 수 있지요. 잘 연구하면서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당부하실 말씀은.

 “전쟁은 결코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 합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적은 아직 앞에 있습니다. 늘 대비하면서 힘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강한 민족입니다. 모진 전쟁을 이겨냈고, 자랑스럽게 일어섰습니다. 그 대단한 역량을 잘 조직해 한데 모으는 일이 중요합니다. 나라를 이끄는 이 모두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글=유광종 선임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한·미 상호방위조약=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 방위조약’이다. 1953년 10월 1일 체결했고 이듬해 11월 18일 발효됐다. 이 조약에 따라 한반도에 무력충돌이 벌어질 경우 미국은 유엔의 토의와 결정 없이 즉각 개입할 수 있게 됐다.

백선엽의 전쟁 철학

가장 끈질긴 싸움 상대는

바로 자기 자신 …

욕망, 타산, 공명심 버려야

전쟁터는 사실 두렵지 않아

싸움에 정신 없이 바쁠 뿐

정말로 두려웠던 건

죽음이 아니라 패전이었다

3일 중앙일보사를 방문한 백선엽 장군(오른쪽)이 중앙일보 지면(3일자 10면)을 보며 전영기 편집국장(오른쪽에서 둘째) 등 본사 편집간부들과 환담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올해로 91세인 노(老) 장군의 평생 화두는 싸움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싸움의 과정과 결과로 본다. 1년2개월 동안 인터뷰를 통해 그는 자주 그런 싸움에 대해 언급했다. 그의 가장 끈질긴 싸움의 상대는 바로 자신이었다. 백 장군은 “나는 늘 그 문제를 생각했다. 역시 모든 일을 처리할 때 다른 무엇보다 자신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전쟁 중에도 사람은 여러 욕망을 누르기 힘들다. 적이 다가오면 불안에 떨기 쉽다. 그런 자신의 욕망, 적 앞에서 두려워지는 마음과 먼저 싸워 이겨야 한다”고 했다. 전쟁 준비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자신의 분방한 욕망, 개인적인 타산, 급히 공을 세워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도 눌러야 한다. 마음을 제대로 가다듬으면 적의 움직임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고도 했다.

 전선에서 수도 없이 적을 맞아 싸웠던 지휘관의 마음은 어땠을까. 두려웠을까, 아니면 의연했을까. 대답은 “정신없이 바빠서 그런 생각을 해 볼 겨를도 없었다”는 것. 그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다 두려움이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무척 바쁘다. 죽음을 생각할 여유가 별로 없다. 늘 전선의 상황을 살펴야 하니까 감정을 되씹을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사단 또는 그 이상의 단위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아주 큰 외과(外科) 수술을 집도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환부(患部)를 제대로 들여다보며, 찢어진 곳은 꿰매고, 곪은 곳은 제거하는 수술처럼 전쟁 지휘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현장’의 중요성도 늘 강조했다. “지휘관이 사령부에만 앉아 있으면 안 된다. 일선의 대대와 심지어는 중대까지 찾아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한다”는 것. 그는 또 “지휘관의 판단력이 승패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 현장을 놓쳤다가는 정말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부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백 장군은 또 “두려워했던 것이 있다면 죽음이 아니라 전쟁에서 지는 패전(敗戰)이었다”고 했다. 패전은 너무 많은 부하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백선엽 주요 전투

단행본 2권까지 나온 백선엽 회고록.

6·25가 벌어진 뒤 많은 전쟁이 있었다. 1년2개월의 회고록 연재를 마친 백선엽 장군은 전쟁 과정에서 국면을 전환시킨 전투를 치른 주인공이다. 그 가운데 다부동 전투, 평양 진격, 금성 전투를 소개한다. 그밖에도 1951년의 강원도 현리 전투, 중공군에 빼앗긴 서울을 수복했던 전투, 3개 정규사단을 이끌면서 벌인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 작전도 유명 전투로 꼽을 수 있다.

#1. 다부동 전투

북 최정예 3개 사단 격파

권총 빼들고 ‘사단장 돌격’

50년 8월 대한민국의 땅은 김일성 군대에 밀려 낙동강 이남만 남아 있던 상태. 북한군 최정예 3개 사단이 대구 북방 20㎞의 다부동에 몰려들었고,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이 그 공세에 직면했다. 다부동에서 뚫렸다면 김일성 군대는 대구와 부산을 한꺼번에 점령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다부동 막바지 전투에서 적이 고지를 넘어 진격해 오면서 아군 대대가 밀리자 백 사단장은 권총을 빼어든 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는 말을 남기고 적을 향해 나아가는 ‘사단장 돌격’을 감행해 결국 적을 물리쳤다.

#2. 평양 진격

미 1기병사단과 북진 경쟁

국군, 15분 앞서 평양 접수

50년 10월 미 1군단의 프랭크 밀번 장군은 북진을 시작하며 평양에 진격하는 공격로 두 개를 모두 미군 사단에 맡겼다. 그러나 1사단장 백 장군은 밀번을 끈질기게 설득해 작전계획을 변경, 공격로 두 개 중 하나를 맡았다. 밤을 낮 삼아 걷고 또 걸었다. 1사단의 힘찬 행군을 지켜보던 미군 전차대대가 스스로 합류하면서 전투력이 부쩍 증가됐다. 다른 한 개의 공격로에 올라섰던 미 1기병사단은 낙동강 교두보에서 먼저 진군했으나, 결국 15분여의 차이로 국군 1사단에 ‘평양 선두 점령’의 영예를 빼앗겼다. 50년 10월 19일이었다.

#3. 금성 전투

전쟁 승패 가른 최후 격전

참모총장 신분에 직접 지휘

53년 7월에 벌어진 휴전 직전 최대 전투였다. 중공군은 24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 춘천 북방의 금성 돌출부를 공격해 남한 유일의 수력발전 댐이 있던 화천저수지를 차지할 의도였다. 대규모 중공군 공세에 밀려 전투 초반 국군 2군단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다급했던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은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에게 “전선으로 가서 지휘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백 장군은 2군단 사령부가 있던 소토고미에 도착해 지휘봉을 잡았다. 물자·장비 동원과 신속한 병력 증원으로 장병들을 다시 조직해 총반격에 나서 중공군의 막바지 최대 공세를 막았다.

유광종 선임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