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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하청 판결 후폭풍 … 노사대립 심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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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판사들에게 눈으로 확인해 보라고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지금 사내 하청 문제를 놓고 파업이 계속돼 비상 인력을 쓰고 있어요.”

 현대자동차 협력업체인 신한기업 대표 김재환씨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느낌”이라고 했다. 서울고법이 지난 10일 “현대차 사내 하청은 근로자 파견에 해당한다”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이 판결은 지난해 7월 대법원이 ‘사내 하청은 도급’이라고 본 원심을 깨고 사건을 돌려보낸 취지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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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내 하청을 도급이 아닌 근로자 파견으로 볼 경우 원청업체는 2년 이상 근무한 하청업체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에 따라 하청업체 근로자들과 사측 사이에 힘겨루기가 이어지고 있다. 근로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데 반해 현대차 측은 “판결을 받은 근로자에 국한된 문제일 뿐”이라고 맞서고 있다. 이렇듯 사내 하청을 둘러싼 소송이 대법원의 최종 판단만 남겨 두게 되면서 산업현장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27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8월 현재 3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 중 사내 하청 근로자는 25%인 33만 명에 달한다. 특히 사내 하청 문제는 자동차업계에서 도드라진다. 정규직과 하청업체 근로자가 한 라인에서 작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양한 형태로 사내 하청을 해 온 전자·정보기술(IT) 업계 등도 이번 판결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대기업 계열 IT 업체 관계자는 “시스템 구축은 우리가 하고 유지·보수 업무만 하청업체에 맡기고 있다”면서도 “원청업체와 하청업체 중 어느 쪽 지휘·감독을 받느냐는 게 모호한 측면이 있어 걱정된다”고 말했다.

 현재 기업들은 “판결이 확정되더라도 근무형태와 기간에 따라 정규직화 여부는 달라질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신한기업 대표 김씨는 “직원 68명이 정규직화에 대한 기대로 노조에 가입했다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54명이 탈퇴했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노총 측은 “유사한 사례의 사내 하청 근로자 모두에게 판결이 적용될 수 있다”고 제시한다. 박성식 부대변인은 “개개인의 근무형태별로 차이가 있다는 건 기업들이 판결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산업계에서는 “정규직화가 불가피해지면 기업들의 해외 이탈이 가속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자동차업계의 한 임원은 “법원 판결대로라면 협력업체 직원은 어떤 형태로든 (원청업체) 관리 아래에 있다고 판단될 가능성이 크지 않겠느냐”며 “수십만 명에 달하는 사내 하청 근로자를 전부 정규직화하는 비용이 엄청날 테고 기업들이 채용을 꺼리면서 결국 해외 이탈이 잇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한 외국계 전자업체 관계자도 “우리는 현대차와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불똥이 어떻게 튈지 몰라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며 “상황에 따라 해외로의 공장 이전도 검토해 봐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이 문제에 대해 정부는 뾰족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용노동부 고용평등정책과 김동욱 서기관은 “노사 간에 자율적으로 합의해 개선해 나가는 게 최선”이라 고 했다.

◆선진국에선 사내하도급 적극 활용=미국과 영국은 파견 대상 업무와 기간에 제한이 없다. 상대적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낮은 독일도 대부분 업종에 파견근로를 허용하고 있다. 종전 24개월이던 파견근로 상한기간도 2004년에 폐지됐다. 1970년대 사내 하도급을 놓고 불법 파견 여부가 논란이 됐지만 80년대 초 독일연방노동법원이 도급계약 자체에서 비롯되는 ‘협의·지시권’을 인정하면서 도급 목적의 지시권과 근로계약상 노무 제공에 대한 지시권을 구별하는 판결을 했다.

박성우·이지상 기자

◆도급=일정 업무를 하청업체에 주고 그 업무를 완성하는 대가로 보수를 지급하는 것. 작업 지휘·감독권이 협력업체에 있으면 도급, 원청업체에 있으면 파견근로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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