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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책 껍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07호 02면

봄방학이 시작되고 새 학년 새 교과서를 받아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묵은 달력을 꺼내 오셨습니다. 달력을 한 장씩 뜯어낸 뒤 가운데를 접고 그 사이에 책 한 권을 얹으셨죠. 책의 위아래, 좌우로 적당히 여백을 두고 달력의 하얀 뒷면이 앞으로 오게 해 정성스레 책을 감쌌습니다.
모든 교과서가 새하얀 옷을 입으면 아버지는 검정 사인펜으로 앞면엔 과목 이름, 뒷면엔 이름을 적어주셨습니다. 하얀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사인펜에서는 뽀드득 소리가 났습니다.

서너 달쯤 지나면 달력 종이도 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손을 깨끗이 씻고 와서 껍질을 살짝 벗깁니다. 교과서 표지가 원래의 모습을 수줍게 드러냅니다. 지난해엔 미처 눈여겨보지 않았던 달력 그림에도 새삼 눈이 갑니다.

중학교에 가서부터는 직접 책 껍질을 쌌습니다. 브룩 실즈나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 같은 예쁜 언니들의 사진을 잡지에서 확보하는 게 우선입니다. 사진을 책 크기에 알맞게 오려놓고 미리 준비한 비닐로 정성스레 쌉니다. 예쁜 얼굴 보느라 공부가 잘 될 턱이 없습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새 책을 받아왔습니다. 문득 옛 생각이 나서 달력을 찾아놓고 옛날처럼 해보았습니다. 달력 종이가 좀 두꺼워진 것 같습니다. 여백을 깨끗하게 접기 위해서는 모서리를 누를 때 종이에 선이 싹 만들어져야 하는데 잘 안 됐습니다. 요즘 교과서는 종이도 좋고, 컬러 인쇄에다, 그림도 많은 것이 보기가 좋더군요.

“아빠 뭐해?”
“어, 책 껍질 싸고 있어.”
“왜?”
“하얗게 새 옷 입으면 보기 좋잖아.”
“그러네. 다른 책도 다 해줘.”

아이가 좋아하는 표정에 힘이 납니다. 옛날 아버지도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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