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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중공군과의 대회전 (274) 몰아낸 대륙의 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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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6·25전쟁에 투입된 병력은 출처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양 진영 각각 127여만 명이었다. 공산진영은 중공군 100만 명, 북한군 26만 명 정도였다. 이에 맞서 한국군 59만 명, 미군 48만 명, 미군 외 유엔군 20만 명이 공산군과 싸웠다. 공산군 측은 압도적으로 중공군이 많았고 북한군 26만 명은 개전 초반에나 힘을 썼을 뿐이다. 이에 비해 한국군은 병력 면에서 아군 진영의 주축을 이뤘다. 사진은 1951년 4월 29일 서부전선에서 병력 재배치를 위해 이동 중인 유엔군의 모습. [중앙포토]


“중공군이 온다.”

중공군이 등을 보였다, 국군 거침없는 북상 … 미군이 막았다

 6·25전쟁이 벌어진 약 3년 동안 전쟁터의 국군이 늘 넌더리를 쳐야 했던 두려운 말이었다. 잠을 청해 자다가도 국군은 중공군이 들이닥친다는 말만 들으면 도망치기에 바빴다. 낯설어서 두려운 군대, 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마구 밀고 들어오는 군대의 대명사가 중공군이었다.

 중공군은 그만큼 전선 곳곳에서 활약이 대단했다. 3년 동안 벌어진 한반도의 전쟁에서 적의 역량 가운데 90% 이상은 중공군에서 나왔다. 흔히 김일성의 군대가 남침해 벌어진 전쟁쯤으로 6·25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 남침을 벌인 것은 김일성 군대였다. 적어도 전쟁 초기 3개월 동안 국군은 치밀하게 준비된 김일성 군대와 전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그 이후로 벌어진 모든 전선의 실제 주력(主力)은 중공군이었다.

 그들은 대륙의 군대였다. 드넓은 중국 대륙의 군대는 삼국(三國)과 고려·조선 등 한반도 왕조에는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저쪽에서 통일 왕조가 등장하고, 한반도에서는 나름대로 안정적이면서 힘을 비축한 왕조가 생길 경우 충돌이 자주 빚어졌기 때문이었다.

 삼국의 고구려와 신라에 이어 고려가 중국과 전쟁을 한 뒤로 한반도의 군대가 대륙의 군대를 맞아 싸움을 벌인 예는 드물다. 만주족의 청(淸)이 대륙을 석권하기 전에 조선을 침범한 병자호란 등이 있으나 그것은 일방적인 싸움에 불과했다.

 그 후 19세기 말에 청나라가 조선에서 부린 횡포는 많은 사람이 아는 일이다. 상전(上典)이라면 상전이랄까. 대륙의 역대 왕조는 청나라처럼 넓은 땅에서 뽑아 올린 거대한 힘으로 늘 한반도를 눌렀다.

 그런 대륙의 군대가 한반도에서 불거진 싸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휴전이 이뤄지던 1953년 7월에는 급기야 한반도 남쪽의 군대와 거의 일대일에 가까운 싸움을 벌였다. 그것이 바로 지금 회고하고 있는 금성 돌출부를 사이에 둔 국군과 중공군의 전투다.

 6·25전쟁 동안 중공군은 늘 국군만을 노렸다. 가장 약했기 때문이었다.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미군은 장비와 화력에서 압도적인 우세여서 중공군은 그들을 늘 피했다. 그 대신 미군으로부터 야포와 공중폭격의 지원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전투력과 조직력에서 뒤떨어졌던 국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국군은 그러나 미군에게 배움을 얻었고, 그들이 지닌 막강한 힘을 빌려 무장(武裝)과 조직(組織)을 갖추기 시작했다. 김일성의 군대가 거의 전투력을 상실한 이듬해인 51년부터였다. 국군은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1·4 후퇴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전선 곳곳에서 싸움을 벌이며 미군의 힘을 자신의 안으로 끌어들여 역량을 갖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국군은 그때부터 당시에는 지니지 못했던 155㎜ 야포와 그 사격술, 정밀한 5만분의 1 지도 이용, 작전 지휘와 참모, 병참과 공병 운용 등 다양한 미군의 작전 방법을 익히고 배웠다. 한 술에 배부를 수는 없었지만, 휴전이 코앞에 닥친 53년에는 국군에게도 독자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6월과 7월에 벌어진 한반도 중동부 전선 금성 돌출부의 전투는 그런 점에서 의미를 살필 필요가 있다. 허약하고 조직력이 떨어져 늘 중공군에게 먹잇감으로 여겨졌던 국군이 또 한 번의 중공군 대규모 공세에 직면했다. 중공군은 24만 명의 대규모 병력으로 국군이 방어했던 돌출부를 거세게 때렸던 것이다.

 중공군은 특히 7월의 막바지 대공세로 국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고, 전략적인 우위도 함께 차지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기울여 쳐들어 왔다. 미군의 공중 지원 사격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시는 우기(雨期)였다. 따라서 미군의 공군 지원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 때문에 국군은 지상군(地上軍)만의 역량으로 중공군의 거대한 공세를 막아야 했다. 국군은 당시 ‘시험대(試驗臺)’ 위에 올라서 있던 상황이었다. 이 중공군의 공세에서 허무하게 물러선다면 미군은 그런 국군을 신뢰할 수 없었다. 한국군 증강 작업 또한 기초에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보란 듯이 국군은 중공군을 막아냈다. 초반에 밀렸던 열세(劣勢)를 극복하고 전열을 신속히 정비하면서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 강인한 면모를 보였다. 이어 반격전에서도 고지를 빼앗은 중공군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국군은 더 이상 중공군의 먹잇감이 아니었다. 전선을 오가는 지휘관, 그 밑의 수많은 장병이 중공군을 향해 과감하게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밀렸던 전선은 다시 힘차게 북상했다. 돌출부의 아래를 지탱하는 금성천이 눈앞에 왔다. ‘대륙의 군대’ 중공군은 막대한 병력을 집중해 쳐내려 왔지만 이제는 강한 탄성(彈性)을 지닌 국군에 밀려 금성천 북쪽으로 밀려 넘어가고 있었다.

 싸움은 리듬이기도 하다. 한 번 밀리면 계속 밀리게 마련이고, 반격의 기회를 잡아 밀어 올리면 계속 밀어 올릴 수 있는 게 싸움이다. 전투는 그런 리듬을 타고 벌어진다. 중공군은 초반의 공세를 이어가지 못해 결국 수세(守勢)에 접어든 뒤 계속 밀렸다.

 국군은 그 반대로 승세(勝勢)에 올라타 중공군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금성천을 넘어서 국군은 저들에게 일거에 내줬던 돌출부 안으로 들어갔다. 한반도를 자주 침탈했던 대륙의 군대는 등을 보였고, 한반도의 군대는 그들을 계속 쫓아 더 북상할 수 있었다.

 아군은 당초의 금성 돌출부 일부인 금성천 북방 4㎞ 지점까지 진격했다. 공격을 더 펼쳐 돌출부 전체를 찾을 수 있었으나 휴전을 앞두고 확전을 우려했던 지휘부는 그 선에서 공격을 멈추도록 했다.

 약 일주일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아군은 1만4300여 명의 사상자 및 실종자를 기록했다. 중공군은 추정 살상까지 포함해 6만6000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전사(戰史)는 적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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