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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 전 의원 “DJ에 누 된다” 처음엔 거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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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2일 서울 중구 순화동 중앙일보 본사 근처에서 장성민 전 의원을 만났다. 그와는 10여 년 전 민주당을 출입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우리는 햇볕정책에 대해 주로 얘기를 나눴다.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지고 난 뒤 민주당이 보인 태도가 옳았는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장 전 의원은 햇볕정책을 시작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비서 출신이고, 청와대 초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냈다. 햇볕정책의 시작과 진화를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사람이다. 그는 예상과 달리 민주당의 대응이 온당치 않았다고 지적했다. DJ의 햇볕정책은 대북 포용정책이 분명하지만 북한이 도발했을 경우엔 즉각 응징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국정상황실장을 지낼 때 겪었던 북한 관련 에피소드를 몇 가지 들려주기도 했다.

햇볕정책에서 시작된 장 전 의원과의 대화는 그가 DJ 비서로 일하던 당시의 여러 가지 회고로 이어졌다. 오래전 이야기였다. 그러나 기자의 입장에선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내용이 적지 않았다. DJ라는 거목(巨木) 아래서 권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한 그의 이야기 속에는 권력의 본질, 정치인의 권력의지, 여론, 정치전략의 가치와 의미 등을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많았다. 지난해 출간된 두 권짜리 『김대중 회고록』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뒷얘기들이 흥미진진했다. 이런 걸 혼자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까웠다. 일종의 직업병이 발동한 셈이다. 본격적인 인터뷰를 하자고 요구했다. 장 전 의원은 펄쩍 뛰며 거부했다. 고인이 된 DJ에게 누가 될 수 있다며,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의 회고록에나 기록하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약 2주간 장 전 의원을 설득했다. 그가 가장 우려한 부분, 즉 이런 회고가 자칫 DJ의 명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다. 설득 논리로 ▶인간적 약점과 나약함이 있어도 DJ가 한 시대의 거인이었다는 걸 아무도 부인 못한다 ▶선진국 정치인들은 회고록에 약점과 결점까지도 솔직히 고백한다 ▶과연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밝혀야 할 책무가 정치인과 기자에게 있다는 걸 주로 들었다. 한참을 주저했고, 여러 가지 단서조항을 달았지만 결국 장 전 의원이 승낙했다.

첫 번째 인터뷰는 2월 6일 마포에 있는 장 전 의원의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오전 9시에 시작된 인터뷰는 오후 9시까지 12시간 동안 계속됐다. 점심 때 잠깐 빌딩 지하에 있는 중국집에서 요기를 했지만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인터뷰는 이어졌다. 날이 몹시 추웠는데, 하필이면 사무실의 온풍기가 고장 나 나중엔 코트를 뒤집어쓰고 이야기했다. 2월 10일과 16일에도 같은 사무실에서 4~5시간씩 추가 인터뷰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워낙 흥미진진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장 전 의원으로부터 동교동 이야기를 들으면서 개인적으로 DJ를 훨씬 많이 이해하게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한 과정에 대해서도 세월이 흐른 뒤 돌이켜보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는 다시 국민의 선택을 받아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벗어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서거한 지 2년이 넘었지만 그는 아직도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남긴 햇볕정책이란 유산 때문이다. 장 전 의원의 표현대로 “정치권은 지금 햇볕정책의 실체가 아니라 햇볕정책의 유령과 싸우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햇볕정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취재를 하면 할수록 박정희 전 대통령과 3김(金)씨로 불린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그리고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시대의 거인들’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제 식민지와 광복, 6·25전쟁과 분단의 고착화, 군사쿠데타와 산업화, 민주화와 국제화 등 정말로 숨가쁘게 달려온 대한민국 현대사는 바로 그들의 역사였다. 오늘날의 정치와 정치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협량함, 정치적 미숙함과 비교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이제는 우리도 명실상부한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평화적 정권교체가 벌써 여러 차례 이뤄졌다. 더 이상 군사쿠데타를 우려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도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야 할 것 같다. 그들 모두가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예우를 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발전한다.

장성민 전 의원이 공개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밝혀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인간 DJ’를 좀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를 좋아했던 사람들과 미워했던 사람들 모두에게. 그리고 앞으로는 밝고 화려한 부분만이 아니라 부끄럽고 숨기고 싶었던 대목들까지도 모두 밝히는 용기 있는 회고록이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우리는 아직까지 그런 기록들을 보지 못했다.

김종혁 중앙SUNDAY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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