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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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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호 29면

튀니지·이집트에 이어 바레인·리비아·예멘·이란 등 중동 각국에서 민주화시위가 한창이다. 그중 바레인은 사실 제도상으론 걸프 지역에서 가장 민주적이다. 입헌군주국으로 내각과 상·하 양원으로 이뤄진 의회도 있다. 서구식 보통선거로 뽑은 40명의 의원으로 이뤄진 마즐리스 안누와브(하원)와 국왕이 지명하는 40명으로 구성된 마즐리스 알슈라(상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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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권리도 걸프 지역 최고 수준이다. 이 지역 최초로 2002년부터 남자와 똑같이 투표권과 참정권을 가졌다. 지역구 1호 여성의원도 이 나라에서 나왔다. 재무부 관리로 일하던 라티파 알가우드는 2006년, 2010년 총선에서 연속 당선했다. 역대 여성장관은 둘이나 있다. 의학박사 나다 하파드가 보건장관(2004~2007년)을 지냈고, 파티마 발루시 박사가 사회장관을 맡았다. 둘 다 해외 유학파다. 여성 권리 신장을 위한 최고여성위원회가 구성돼 사비카 왕비가 위원장을 맡고 있다.

야당인 와드(약속)당은 걸프 지역의 최초이자 유일한 합법 좌파 정당이다. 와드당 부총재는 바레인 대학교수인 무니라 파크로라는 여성이다.

하지만 그림자도 크다. 1973년 구성된 초대 하원은 75년 아미르(이슬람 군주)였던 이사 빈 술만 알칼리파에 의해 해산됐다. 정부가 제안한 국가보안법을 부결한 데 대한 괘씸죄 때문이었다. 94년 14명의 지식인이 헌정 회복을 청원했다. 민주주의 복귀와 고문 중지를 요구하는 여성 350명의 청원이 뒤를 이었다. 이를 계기로 항의시위가 촉발됐고, 2000년까지 수시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시위 사태는 99년 이사가 죽고 아들 하마드가 뒤를 이은 다음에야 진정됐다. 하마드는 2001년 2월 국민행동헌장을 발표하고 헌정을 회복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총선을 앞두고 인권 문제를 거론했다는 이유로 정부가 야당 정치인들을 구속하면서 시위 사태가 재연됐다. 야당들은 선거를 보이콧했다. 시위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이다. 내각 요직들은 온통 왕족 차지다. 칼리파 빈 술만 알칼리파(76) 총리는 지구상에 현존하는 최장수 총리다. 독립 직후인 71년부터 40년간 재직 중이다. 현 국왕(2002년부터 아미르에서 국왕으로 호칭을 바꿨다)의 삼촌이다. 부총리인 무함마드 빈 무바라크 알칼리파(76)는 독립 때부터 35년간 외무장관을 맡다가 6년 전 다른 왕족에게 장관직을 넘겨주고 부총리로 자리를 옮겼다. 국민의 70%가 이슬람 시아파, 30%가 수니파이지만 1783년부터 군림해 온 왕실은 수니파다. 소수 지배층과 다수 민중의 온도차가 클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게 왕실이 의회민주주의를 군주제의 장식품으로 여기고 있지 않으냐는 의문을 품게 한다. 혹 최고통치자가 민주주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제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닐까. 민주주의 형식만 갖추면 된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잇따른 시위 사태를 부른 건 아닐까. 하기야 그런 일이 중동에서만 벌어질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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