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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중공군과의 대회전 (267) 화풀이에 나선 중공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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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휴전협정 조인 이듬해인 1954년 6·25전쟁 참전 중공군 포로들이 풀려나 당시 ‘자유중국’으로 불리던 대만으로 가기 위해 행진하고 있다. 중국은 유엔군 측에 잡힌 중공군 포로들이 대만으로 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해 53년 6월 반공 성향의 포로를 전격 석방한 한국 이승만 대통령을 매우 증오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중국은 1953년 6월의 공세에서 일단 조그만 성과를 거뒀다. 한국군이 지키고 있던 금성 돌출부의 동쪽 끝을 공략해 4㎞ 밀고 내려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거둔 그 소규모의 승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핵폭탄과도 같았던 반공포로 석방에 묻혀 더 이상의 뉴스거리가 되질 못했다.

반공포로 석방에 묻힌 승전보 #“이참에 한국 철저히 짓밟아라” #중공군 7월 들어 또 대공세 #한 치 땅 뺏기, 시간싸움이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중국은 한반도 중부 전선에 속하는 금성 돌출부를 공략함으로써 몇 가지 효과를 노렸다. 우선은 전선 너머 국군이 방어하고 있던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휴전이 이뤄지기 전에 자신들이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알리고자 했다. 아울러 걸핏하면 ‘대한민국 국군의 유엔군 탈퇴, 단독 북진’을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기세를 꺾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게다가 전선에서 공세를 강력하게 펼쳐 미군으로 하여금 하루라도 빨리 휴전협정 조인을 서두르게 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의도 아래 펼쳤던 53년 6월의 공세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카드에 다 밀려 버리고 말았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단독 북진을 통한 한반도 통일이라는 꿈을 버리지 않았고, 그에 따라 모험적으로 북진을 시작할 경우 휴전회담을 아예 물거품으로 돌릴 수도 있었다. 그런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가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하는 일대 사건으로 번지면서 중국은 커다란 당혹감에 빠졌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중국은 급했다. 휴전협상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 있기에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도발적인 성격의 한국 이승만 대통령이 단독 북진을 감행해 한반도의 전쟁이 마침내 재차(再次)의 확전으로 치달을 경우 중국은 미국의 직접적인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확전이 불가피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는 미국 행정부가 공개적으로 경고한 내용이기도 했다. 미국은 이미 전술적으로 핵을 운용할 능력을 갖춘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은 휴전이 물거품으로 변하고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면 수많은 병력이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핵무기로 전쟁을 끝낸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의 국내 사정으로 볼 때도 중국은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불붙어 미국의 핵무기 위협 등에 직면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3년 동안 전쟁을 수행한 당시의 중국은 재차의 전쟁을 견딜 만한 역량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휴전을 하루빨리 성사시킨다는 중국의 당초 목표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은 중부 전선 등에서의 제한적인 전쟁은 가능하다고 봤다. 미국이 국지전 성격의 그런 자신의 공세에 정면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도 했다. 그런 중국이 53년 6월 공세 때 거두지 못했던 전략적 목표를 더 달성하기 위해 공세를 벌일 것이라는 점은 누구라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그 즈음에 들었던 정보는 이런 내용이었다. 한국에 참전한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를 비롯한 중공군 최고 지도부는 “이번 기회에 한국을 철저하게 유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풀어 말하자면, 한국에 씻을 수 없는 패전의 상처를 남겨준 뒤 휴전협정 조인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도였다.

 중공군의 그런 입장에는 다소 감정적인 면도 섞여 있었다. 자신들이 벌인 53년 6월 공세가 이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모두 희석(稀釋)된 점, 또 그가 병력과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단독 북진’을 주장하며 국면(局面)을 확전으로 치닫게 하고 있는 점 등이 불편했던 것이다.

 그런 한국의 체면을 철저하게 짓밟으면서 실질적으로는 전선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넓혀가는 방법은 또 한 번의 대규모 공세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그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목표는 금성 돌출부였다. 적과 마주하고 있는 한국의 모든 전선을 통틀어 볼 때 국군에 최대의 타격을 주면서 화천 댐과 춘천까지 뒤흔들 수 있었던 금성 돌출부는 중공군이 소기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가장 안성맞춤이었던 곳이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펼쳤던 극적인 반공포로 석방 사건의 여파를 수습하고 있었다. 6월 18일 전격적으로 진행한 반공포로 석방은 미국은 물론 참전 유엔국가와 심지어는 중국과 소련 등 공산 국가에도 거대한 충격으로 작용했다. 나는 그 가운데서도 미군과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작업에 몰두해야 했다.

 당시 한국으로서는 미군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들과의 원활한 협조 시스템을 허문다면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의 모든 국면을 관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다행히도 이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사건이 몰고 온 후유증이 더 이상의 큰 상처로 번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수습 또한 빨랐다.

 미군과의 관계는 예전처럼 아무런 마찰 없이 잘 유지되고 있었다. 7월에 접어들면서 이제 곧 휴전이 현실로 닥칠 것이라는 분위기가 농후해졌다. 국군이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했다. 전선에서 가능하면 북상해 한 치의 땅이라도 우리 영토로 끌어 안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전선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국군과 유엔군, 그에 맞선 북한군과 중공군은 서로 한 고지라도 더 뺏기 위해 분주하게 국지전 성격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7월 들어서면서 위기감이 가장 높아졌던 곳은 역시 금성 돌출부였다. 중공군은 그리로 다시 모여들고 있었다. 대한민국 군대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라는 그들 최고 지도부의 명령에 따라 국군만을 겨냥한 중공군의 총 끝이 그곳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아주 대규모의 군대였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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