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지석철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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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라는 유행가도 있었지만 비어있는 의자를 보면 앉고 싶다. 지친 다리를 잠시 쉬어가고 싶다. 그래서 의자 하면 우선 푸근함으로 다가온다. 헌데 서양화가 지석철(46)씨가 그리는 의자는 앙상하니 뼈대만 남은 초라한 꼴이다. 쉬기는커녕 잘못 앉았다가는 자빠지기 십상일 듯 싶다. 한 마디로 '불쌍한 의자'다.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노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에 내놓은 작품은 이러한 의자의 몰골을 이용해 현대인의 쓸쓸한 정감을 내비치고 있다. 니스 해변에 서 있는 고물차가 토하듯 쏟아내 놓은 의자 더미. 철골과 나사가 튀어나온 벽 틈에 무더기로 버려진 의자들. 화려한 날을 뒤로 하고 이제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으로 소일하는 퇴물 배우의 말년 같은 모습이다.

"텅 빈 의자는 '잊혀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한때는 앉아 있었지만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지요." 그래서 보기에는 앙상하지만 그 밑에는 휴머니즘이 깔려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의자를 그리는 과정은 흥미롭다. 먼저 대나무 가지를 잘라 맥주잔 만한 높이의 의자를 직접 만든다. 완성된 의자를 사진으로 찍은 후 사진을 참조해가며 그리는 것. 대상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인 이른바 하이퍼 리얼리즘이다. 실재하지 않는 존재를 마치 진짜 있는 것처럼 그려내는 그의 수법 덕에 의자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더욱 휑하다.

그는 78년 제1회 중앙미술대전 장려상을 받아 화단에 데뷔했으며 현재 홍익대 교수다. 82년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을 때부터 의자를 주제로 판화.설치.회화 작업을 보여줬다.

02-732-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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