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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특종]박정희 사후 20년만에 공개 - 국토개조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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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조국의 미래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분명하고 구체적인 그랜드 디자인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구상대로 국가를 성공적으로 바꾸고 경영해 오다 10·26이라는 돌발적 사건으로 자신의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세운 국토개조계획은 ‘선진조국 건설’이라는 목표를 가진 박정희식 그랜드 디자인의 완결판인 셈이다.[편집자]

탕!탕! 운명의 날 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 40분쯤 19년간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충복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살해됐다. 11월3일 국장(國葬)
으로 치러진 박대통령 장례식을 마친 뒤 어느날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은 대통령 집무실을 정리하기 위해 비서실장 방에 모두 모였다.

10·26 이후 대통령 집무실은 폐쇄되었다. 뒤에 알려진 것이지만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대통령 가족들만이 이 방을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하여튼 수석들 입장에서는 각하의 집무실인 만큼 정리가 시급하긴 했으나 방주인의 유고(有故)
상태에서 개별적으로 불쑥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리를 제안한 것은 최광수 의전수석이었다. 그는 비서실장이던 김계원이 김재규와의 공모혐의로 계엄사 조사를 받는 동안 자연스레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최규하 총리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게 됐기 때문인지 뒤처리를 주도하였다. 함께 그 방에 들어간 사람들은 유혁인 정무 제1수석, 고건 정무 제2수석, 서석준 경제 제1수석, 오원철 제2수석, 박승규 민정수석, 임방현 공보수석 등이었다.

최수석을 선두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집무실은 뭐 하나 흐트러진 것이 없을 정도로 정돈돼 있었다고 한다. 책상 위에 결재서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날 결재할 것은 즉시 결재해 버리고 마는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을 보여준다. 그는 해야 할 일을 남겨두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동쪽 창 밑에 새로 갖다놓은 간이탁자 위에 2권의 두툼한 보고서가 모두의 눈에 띄었다. 대통령은 집무실용 큰 책상과는 별도로 간이탁자를 동쪽 창 밑에 갖다놓고 종종 이 탁자에 앉아 책을 읽곤 했다. 집무실의 큰 책상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일까. 농민의 아들답게 그는 막걸리를 좋아하고 한여름에도 절대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 청와대 비서관들에게는 그가 창문을 열어놓고 부채를 부쳐가며 파리를 잡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탁자 위에는 두권의 보고서와 쇠로 만든 구식 스탠드, 그리고 지름이 10cm가 넘는 큼직한 돋보기가 비스듬이 놓여 있었다. 당시 환갑을 넘긴 나이(62세)
의 박정희는 책을 볼 때 돋보기를 쓰곤 했다. 여러 사람의 눈길을 끌어모았던 큼직한 돋보기는 운명의 그날이 있기 전날까지도 박정희가 이 보고서를 밤늦게까지 들여다봤음을 짐작하게 하는 정황증거물이었다.

죽기 전날까지 대통령의 관심을 붙들어 놓았을 푸른색 커버의 보고서는 무엇인가. 두권의 보고서 중 파란색 하드커버의 표지에는 ‘행정수도건설을 위한 백지(白紙)
계획’이라는 제목이, 초록색 표지의 또 하나에는 ‘2000년대의 국토구상’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책 표지 안쪽에는 한정된 부수만 간행됐음을 의미하는 넘버링이 붙어 있었다. 그날 대통령 집무실에서 발견된 그 보고서의 넘버링은 당연히 1번이었을 것이다.

그 보고서는 단순한 업무보고용 책자가 아니었다. 구체적 수치와 설계도, 공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용역연구보고서였다. 보고서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도표와 지도·개념도·공정도 같은 전문적이고 공학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대통령이 과연 이런 실무적인 보고서를 읽어낼 수 있었을까.

“그런 의문은 박대통령의 공학적 관심과 지식의 수준을 잘 몰라서 갖게 되는 의문입니다. 그분이 포병장교 출신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분은 공학적 관심이 취미인 데다 전문가적 지식까지 갖추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는 직접 설계하고 작업지시를 할 정도 아니었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 보고서를 읽으면서 완성된 도시의 구석구석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머릿속으로 그려가며 상상하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분 자신이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였던 겁니다.”

수석비서관으로서 7년 넘게 대통령을 지척에서 보좌해 왔던 오원철 전 경제수석(70)
의 설명이다.
수석들은 자신들과 관련된 서류나 보고서가 없는 것에 저으기 실망하는 표정들이었다. “오수석 것뿐이군, 그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서류정리가 끝난 뒤 오원철 수석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큰소리로 “옛날에 왕이 돌아가시면 신하들이 모두 사임하는 것이 도리인데 우리도 모두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닙니까”했다. 그러나 모두들 그를 외면한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머쓱해진 오수석도 말문을 닫고 말았다.

◆ 역사 속에 묻혀져 간 “2000년대 국토구상”

박정희가 죽기 전날까지도 밤늦게 읽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두권의 보고서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에서 2년여에 걸쳐 연인원 3백91명의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해 만들어 놓은 수도이전계획의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기획단장이던 오원철 수석이 지난 5월쯤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였다.

오수석은 이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올리며 “지시한 대로 백지계획이 완성됐습니다”라고 하자 대통령은 다른 말 없이 “알았어. 놓고 가”했다.

대통령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늘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이곤 했다. 중요한 보고의 경우 대통령은 혼자서 보고서를 꼼꼼히 읽고 또 읽는다고 한다. 설명이 필요하면 실무자를 불러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혼자 생각을 했다. 마침내 결심이 서면 보고를 올린 사람을 시켜 브리핑을 하게 했다. 대개의 경우 브리핑은 관계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자리다. 국가 중대사일 경우 대개 국무회의 석상에서 브리핑을 받았다. 따라서 그가 브리핑을 받겠다고 할 때는 어떻게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이 이미 섰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박정희는 오원철 수석이 중화학공업추진계획을 보고했을 때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중화학공업추진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혼자 꼼꼼히 읽고 또 읽고 나서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국무회의가 열린 자리가 또한 청와대 지하에 있던 국산병기 전시실이었다. M16소총을 비롯해 박격포·자주포 등 국산병기가 잔뜩 진열된 국산병기 전시실을 브리핑 장소로 택한 것은 방위산업에 대한 자신의 강력한 의지를 의도적으로 드러내 보일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73년 1월31일 박통은 오원철 수석으로 하여금 전(全)
국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중화학공업추진계획에 대한 보고를 하게 했다. 그날 보고가 끝난 뒤 대통령은 “내가 전쟁을 하자고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며 총예산 1백억달러가 투입되는 중화학공업화 추진계획을 그 자리에서 결정했던 것이다. 그날 결단은 다시는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지 않고 평화적인 남북통일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화와 방위산업을 통해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져야겠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73년 당시 우리나라 수출총액이 17억달러였음을 감안하면 총규모 1백억달러가 투입되는 중화학공업화 프로젝트가 얼마나 큰 투자규모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로서는 국운(國運)
을 건 결정이었다.

보고서를 올렸을 때 대통령이 “두고 가라”고 했던 의미를 오수석은 이렇게 미뤄 짐작했다.
“행정수도 건설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지금까지의 검토단계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발진하는 단계에 와 있다. 대통령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적어도 10~15년 걸리는 대규모 사업이다. 투자되는 재원도 당시 재정규모로 볼 때 염출이 쉽지 않은 규모이고 파급효과도 엄청나다. 어떻게 이를 끌고 갈 것인가, 어떻게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대통령은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은 것이다. 어쨌든 한 나라의 수도를 옮기는, 1천년 앞을 내다보는 대역사(大役事)
아닌가.”

대통령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는 오수석은 박정희에게 올린 공식적인 보고서 외에 별도의 실천적 계획안을 완성했다. 이름하여 “2000년대 국토구상”이다.<사진 참조>
용역보고서를 토대로 자신의 구상에 대통령의 의지를 반영한 국토개발 최종안인 셈이다. 그는 이를 보고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 보고안에는 행정수도 건설을 계기로 국토를 완전히 개조하겠다는 원대한 구상이 담겨 있었다. 20년 앞을 내다보는 국토개조의 그랜드 플랜이었다.

오원철은 브리핑 차트를 만들고 이를 슬라이드로 다시 제작했다. 슬라이드로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행정수도 모습을 형상화한 모형까지 만들었다. 행정수도에 들어갈 도시 각 부분과, 주요 관공서 건물이 입주하는 중심지역의 모형까지 만들어 중화학공업추진기획단 사무실에 전시해 놓았다. 보고할 만반의 준비를 완벽히 갖춰 놓고 그는 대통령의 하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끝내 그를 부르지 않았다. 당시 정국은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사건과 YH여공 신민당사 투신사건, 부마사태 등으로 걷잡을 수 없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10·26사건이 터졌다. 만 3년, 준비기간까지 포함하면 5년에 걸쳐 한국의 내로라 하는 도시계획 전문가들과 외국의 석학들이 참여한 가운데 극비리에 완성된 국토개조계획은 이렇게 대통령에게 보고조차 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묻혀져 갔다.

◆ 박정희가 행정수도 건설에 집착한 이유

박대통령이 정확히 언제부터 행정수도 건설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이를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여러 주변사람들의 증언에서 확인된다. 다만 대통령이 행정수도 건설 구상을 처음 입밖으로 털어놓은 것은 75년경이었다고 김정렴 당시 비서실장은 증언한다.

75년 7월 진해 대통령전용 하계휴양지에서의 일이다. 대통령은 휴양지에 와서도 마음 편하게 쉴 틈이 없었다. 당시 월남이 패망해 공산화되고 적대관계에 있던 미국과 중국이 수교하는 등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비책 마련에 분주했다. 그때쯤 박대통령은 김실장을 불러 “아무래도 안보상 휴전선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새로운 행정수도를 건설해야겠다”는 자신의 구상을 털어놓고는 이를 극비리에 챙겨 보라는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또 이같은 생각을 대통령은 함께 휴가를 보내기 위해 진해에 와 있던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환담하는 자리에서도 말했다. 수도권 인구집중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통령은 “결국 서울인구를 분산시킬 수 있는 방법은 수도를 옮기는 길밖에 없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 계획은 서울 방호에 대한 구체적 대비가 확고히 마련되고 국민들도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될 때까지 국민들에게 미치는 심리적인 영향을 고려하여 일체 보도하지 않기로 엄격한 엠바고가 내려졌다.

이 문제가 공식화된 것은 77년 2월10일이다. 박대통령이 서울시 연두순시 자리에서 “통일될 때까지 서울에서 고속도로나 전철로 1시간 내지 1시간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지점에 인구 몇십만명 정도의 아담하고 능률적인 임시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는 자신의 구상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했던 것이다. 충격적인 대통령의 구상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우려했던 만큼의 혼란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당시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였던 만큼 많은 공무원들도 단순한 아아디어 차원의 발상 정도로 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수도권 인구를 억제하기 위한 여러 방안 가운데 하나로 한번 검토해 보겠다는 소리 아니겠나 하는 반응이 많았다. 그런 만큼 실현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박정희는 그러나 그해 3월7일 다시 한번 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재확인한다. 박정희는 이미 10여차례 서울시 건설부 경제기획원 등에 수도권 인구문제의 해결을 지시한 바 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1976년 무임소장관실에 아예 이 문제를 전담할 기구(수도권인구정책실)
를 별도로 설치했다. 그러고는 재무부 이재국장 출신의 박봉환을 실장으로 임명하여 이 문제를 다루게 했다.

박실장은 1년여에 걸친 작업결과, 각종 용역에서의 건의, 외국의 사례와 그에서 얻은 교훈 등을 참조하여 ‘수도권인구재배치기본계획’을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전국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에서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자신의 의지를 다시 한번 명확히 밝혔다. 이날 박실장의 보고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도권 인구집중의 근본 원인은 첫째, 중앙집권적인 행정체제 둘째, 제조업의 과도한 서울집중(당시 제조업 종업원의 27%가 서울에 편중돼 있었다)
셋째, 교육기관의 서울 집중 넷째, ‘사람은 나면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라는 국민들의 뿌리깊은 의식구조 등에 있다.

따라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당면대책으로 ▷반월공단을 조성해서 서울에 있는 제조업 공장들을 그곳으로 이전하고, 중장기대책으로는 ▷지방 5대 거점도시의 중점개발이 필요하다. 서울 외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를 흡수할 수 있는 거점도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당시까지 1군(郡)
1공장식의 획일적인 새마을 공장 정책의 실패사례를 반성하고 공업용수나 배후여건을 고려하여 인구 30만 이상 거점이 될 만한 도시를 중심으로 지역특성에 맞는 특화된 공장을 건설해 수도권집중의 요인을 흡수해야 한다.”

◆ 놀란 최규하 “이 태평한 시대에 수도를 옮기다니…”

이같은 대책과 함께 제시된 것이 행정수도 건설계획이었다. 다른 대책은 당면한 긴급대책의 성격이었던 반면 보다 근본적인 대책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행정수도 건설안이었다. 이를 통해 수도권 인구유발요인을 근원적으로 예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날 보고의 핵심이었다.

보고에 들어가 목차에 행정수도 건설계획이 나오는 순간 국무회의 분위기는 일순 긴장감이 돌았다. 2시간에 가까운 보고 동안 기침소리 하나 없었다. 박대통령도 긴장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메모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박실장은 “아, 이젠 됐다”고 확신했다. 대통령은 보고내용이 맘에 들 때는 열심히 메모를 하지만 시원찮으면 적지도 않고 쳐다보기만 한다는 것을 박실장은 여러번의 브리핑 경험을 통해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박실장이 이날 대통령의 반응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보고하는 바로 그날 아침에 있었던 최규하 국무총리의 반응 때문이었다. 총리실로부터 국무회의 보고내용을 아침에 총리에게 먼저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브리핑을 했더니 최총리가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경악했다. 최총리는 “이 태평한 시대에 수도를 옮기다니….

나는 너무 엄청나서 코멘트를 못하겠다”며 당황해했다. 게다가 10시쯤 총리 비서실장을 보내 행정수도문제를 대통령 보고에서는 빼라고 요구해 왔다. 최총리는 “박실장은 큰일을 저지를 사람이야”라며 마치 그를 혹세무민(惑世誣民)
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실장은 “행정수도 건설계획이 이번 보고의 핵심인데 그럴 수는 없다”며 “혹세무민을 하든 국가에 큰 공헌을 하든 내가 책임지겠다”며 2시 국무회의 보고를 강행했다는 것이다.

설명이 끝나자 대통령은 맨 끝자리에 있는 구자춘 서울시장으로부터 총리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의견을 말하도록 했다. 그러나 아무도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총리조차도 아침 보고 때와는 달리 “남아프리카 어느 나라도 그같은 이유로 수도를 옮긴 경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 유기춘 문교부장관이 느닷없이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했다. “각하, 행정수도 건설문제는 국가안보상 중대한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신중을 기해야 될 문제입니다. 그리고 저 보고에 따르면 대학이 서울에 너무 많이 있는 것이 인구집중 요인의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래서 연구기관에 용역을 줘 연구를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이 버럭 소릴 질렀다. “연구는 무슨 연구야. 이렇게 많은 대학과 대학생이 한곳에 집중돼 있는 나라가 있어?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것 아닌가. 실은 나도 2, 3년 전부터 저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어”했다. 박정희는 대책안에 나와 있는 행정수도 후보지를 가리키며 “우리도 6·25전쟁이 끝난 뒤 저 정도의 자리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어 머물렀어야 했어. 민족의 정기니 뭐니 하며 서울로 기어올라와서 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저 방법 외에 무슨 방법이 있어?”

명분을 싫어하고 실용주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박정희의 모습을 잘 설명해 주는 일화다. 그는 60년대 후반부터 수도권 인구집중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는데 이를 보면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행정수도 건설이라는 목표를 심중에 갖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집권초기 그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마음에 넣어두기만 했다가 70년대초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갖게 되자 마침내 실행에 옮기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여튼 박정희의 적극적인 자세 덕분에 박실장은 하마터면 뒤집어쓸 뻔했던 ‘혹세무민의 죄’를 벗을 수 있었다. 또 속으로 각오하고 있던 사표를 내지 않아도 됐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박실장이 제시한 방안을 하나하나 해당부처에 지시했다. “건설부장관은 이 계획대로 공단용지를 반월로 정하여 공업용수와 전력을 공급해서 서울에 있는 공장이 쉽게 빠져나가도록 유도해 주고, 반월과 서울은 거리가 가까워 그 사이에 주거지역들이 들어서면 도시가 연결될 가능성이 높으니 그린벨트를 확장해서라도 이를 막아야 해. 저 계획대로 시행해. 각부 장관들은 기본구상에 따른 세부 집행계획대로 시행하고 총리와 부총리는 저 계획대로 시행되도록 밀어주고….”

그러나 박대통령은 지시 끝에 뜻밖의 말을 덧붙였다. “다만 행정수도 건설문제만은 청와대에서 내가 직접 하겠어.”이미 청와대 내에서 행정수도계획의 구체적 검토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을 알 리 없는 박실장은 행정수도 건설업무를 직접 추진하겠다는 대통령의 마지막 말을 행정수도에 대한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받아들였다.

◆ JP와 김재규도 행정수도 검토 지시 받아

박봉환 전 장관은 청와대 보고 후 있었던 일화를 또 하나 소개했다. 수도권 인구대책에 대한 보고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있던 박실장은 며칠 뒤 김재규 당시 건설부장관으로부터 잠깐 다녀가라는 전갈을 받는다. 박실장이 건설부 장관실로 들어서자 김재규는 문앞에까지 나와 그를 맞아들였다. 그러고는 “박실장은 어떻게 각하의 품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각하의 뜻을 그리 잘 알아 난제를 풀어냈소”라며 그날 보고를 치하했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행정수도 건설의 대임(大任)
은 박실장이 맡아 처리해야할 것 같다”며 서류 보따리 두 덩어리를 내밀었다.
“하나는 각하께서 JP(김종필)
에게 하명하여 몇 개의 후보지를 공중촬영하여 장단점을 비교한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건설부에서 극비로 작업한 것이오. 두가지 다 작업에 참고가 될 것이오.”
서류를 살펴보니 수도 후보지를 공중촬영한 사진과 지질조사분석자료 등이 들어 있었다.

박정희는 이처럼 청와대뿐 아니라 건설부과 JP에게도 행정수도 건설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75~76년경이었다는 것이 당시 건설부 국토계획국장이던 김의원(金儀遠·69)
씨의 증언이다. 김씨는 건설부에서 국토계획 관련 업무를 오랫동안 해오고 경원대 대학원장과 총장을 역임한 국토계획 관련 전문가다.

김의원은 76년 여름 어느날 김재규 당시 건설부장관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당시 그린벨트 설치와 반월공단 및 과천 신도시를 한참 건설하던 때여서 대통령의 호출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청와대 집무실에서 차를 한잔 하고 나니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비서실장(김정렴)
과 대변인(임방현)
을 나가 있으라고 했다. 김국장은 사안의 중대성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속으로 “아, 이건 보통일이 아니구나”생각했다. 김국장은 노트를 펴들고 긴장된 자세로 대통령의 하명을 기다렸다.

박정희는 뜸도 들이지 않고 바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도를 옮겨야 되겠어” 그 한마디에 김재규 장관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각하, 정말이십니까?” 대통령은 “아니, 국장은 안 놀라는데 장관이 왜 그렇게 놀라나”며 빙그레 웃었다. 박정희는 극비로 추진할 것임을 재차 강조하며 행정수도 건설의 타당성 조사를 지시했다.

사실 대통령의 지시를 듣고도 김의원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당시 그린벨트 설치와 입지규제 등 갖가지 억제 시책에도 수도권 인구는 나날이 늘어나기만 했다. 비상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는 한 증가추세를 되돌리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김의원은 속으로 “영감이 이제서야 뭔가를 깨달은 모양이다”며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 지시가 있고부터 6개월쯤 뒤 대통령은 서울시 연두순시 때 행정수도 구상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했던 것이다. 그동안 김의원은 대통령에게 건설부의 검토결과를 세번 보고했다. 보고 때마다 배석자는 없었다. 한번은 서재로 그를 데려간 대통령이 그에게 앨범 뭉치를 내밀면서, 국무총리를 하다 당시 쉬고 있던 김종필(JP)
을 시켜 조사한 후보지 검토자료라고 말했다. 국방부를 동원해 후보지를 항공촬영한 사진과 지질조사 도면들이 들어 있었다. 대통령은 “이것이 참고가 될 테니 잘 갖고 있으라”며 자료를 그에게 넘겨줬다.

건설부 및 JP가 행정수도 문제를 검토한 자료는 현재 김의원씨가 소장하고 있다. 자료 중에는 박정희가 행정수도 건설의 선정기준을 11가지로 정리해 친필로 지시한 메모도 들어 있다. 김씨는 “이 메모를 보면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얼마나 고심했는지, 또 국토계획 전반에 대해 박대통령이 얼마나 전문가적인 식견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 “수도 옮겨야 김일성하고 같은 위치에서 지휘 가능”

박정희는 이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건설부장관으로 있다 79년쯤 중앙정보부장으로 옮긴 김재규로부터 김국장은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 “자료가 어디 있는지 대통령이 관심을 갖고 있으니 김국장이 잘 보관하라”는 당부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박정희의 집요한 관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때 김국장은 대통령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각하, 행정수도 건설문제는 일개 부처의 일개 국(局)
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건설부가 가장 관련이 많기는 하지만 모든 정부 부처가 관계된 일인 만큼 범정부적 기구가 필요합니다. 이를 담당할 별도조직을 만드십시오.”
이런 건의도 했다고 한다.

“각하, 행정수도 문제를 비밀리에 추진하기보다는 일정시점에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행정수도를 만들 계획이라는 발표만으로도 수도권 인구억제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박정희는 김국장에게도 수도를 옮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이봐, 내가 육군참모총장이라도 이북이 쳐들어왔을 때 수도권에 이렇게 인구가 많아서야 전쟁을 할 수가 없어. 생각해 봐. 박격포 한 방만 서울 상공에 떨어져도 6백만 시민이 피난가겠다고 보따리를 싸들고 몰려나올텐데 어떻게 전쟁이 되겠어? 이북하고 제대로 전쟁을 하려면 적어도 휴전선에서 평양거리만큼은 떨어진 곳에 수도가 자리잡아야 김일성하고 같은 위치에서 전쟁 지휘가 가능한 거야.”

그같은 건의 때문이었을까. 박정희는 행정수도 건설문제를 다음해 초(77년 2월)
서울시 연두순시를 기해 극적인 방법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또 행정수도 문제를 당시 자신의 특명사항을 전담해 추진하던 중화학공업추진기획단(단장 오원철 경제2수석)
에 맡겨 추진토록 했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수도권대책을 성공적으로 보고한 뒤 박봉환 실장은 청와대 오원철 제2경제수석으로부터 잠깐 다녀가라는 전갈을 받았다. 비서실에 들어서니 오원철은 박실장의 보고를 치하한 뒤 각하의 지시라며 “중화학공업기획단의 부단장을 맡아 행정수도 건설문제를 담당해 달라”고 말했다. 당시 중화학공업추진기획단은 직제상으로는 국무총리 산하에 있었으나 사실상의 업무는 청와대의 직접 지휘를 받고 있었다. 기획단은 박대통령의 특명으로 중화학공업 추진과 함께 방위산업 추진도 맡고 있었다. 단장은 오원철 제2경제수석이었다.

오원철은 행정수도 건설업무가 비밀작업임을 감안해 따로 별도조직을 만들지 않고 기존 조직내 인원보충만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다. 일종의 위장작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박봉환은 중화학공업추진기획단에 합류하게 됐다.

박씨는 자신의 참여로 행정수도 건설업무가 처음 시작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청와대 내에서는 2년전(75년)
부터 극비리에 행정수도 건설에 대한 검토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이 김정렴 실장의 증언이다. 수도권 인구억제대책의 일환으로 행정수도 건설의 불가피성을 박실장이 보고하자 심중에 같은 계획을 갖고 있던 박대통령이 이를 크게 반겼고 박실장이 도움이 되겠다 싶어 이미 작업을 하고 있던 기획단으로 불러들여 일하게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김정렴 실장에 따르면 75년 여름 진해 휴양지에서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귀경하자마자 바로 오원철 제2경제수석을 불러 행정수도 건설에 관한 기본구상을 극비리에 검토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후 76년말 제2경제비서실은 1년여의 연구 끝에 수차의 중간보고를 거쳐 새 행정수도의 기본구상을 마련, 박대통령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당시 오원철 수석이 제시한 행정수도 건설계획의 주요골자는 다음과 같다. ▷새 행정수도의 규모는 최대인구 50만명을 목표로 하되 1백만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한다. ▷그 위치는 휴전선과 평양까지의 거리와 동일한 거리에 있는 휴전선 남부지역으로 한다. ▷새 행정수도의 건설투자는 최소한으로 하며 이를 위하여 면적은 반경 10km권으로 하고 기존 지방도시는 광역외곽 위성도시로 활용한다. ▷건설기간은 국가재정의 부담을 가능한 덜기 위해 10~15년간의 장기로 잡는다.

박대통령은 78년 1월18일 연두기자회견에서 행정수도건설 추진상황을 상세히 밝혀 행정수도 건설에 대한 자신의 집념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대통령은 행정수도 건설의 추진상황을 묻는 기자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행정수도 건설의 필요성, 행정수도 건설의 추진방법, 인구규모, 서울과의 접근성, 건설에 따른 기간 등에 대해 언급했다. 다음은 그날 있었던 행정수도 건설과 관련된 박대통령 발언의 요약이다.

“…임시행정수도 건설의 기본구상으로는 인구 50만~1백만명으로 하겠다는 것이 절대적 조건의 하나이고 거리는 서울에서 고속도로나 전철로 2시간내에 오고가는 정도라야 합니다…. 임시행정수도 건설문제를 빨리 공표한 것은 국가의 중·장기계획을 세우는 데 지침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밖에 국가기관의 배치나 철도·고속도로 건설도 임시수도에 따라 크게 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히 해둘 것은 임시수도가 세워져도 대한민국의 수도는 여전히 서울이라는 점입니다. 정부는 앞으로도 서울을 계속 국제도시로서, 수도로서 정비하고 가꾸어 나갈 것이며 수도 사수(死守)
의 결의와 전략개념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습니다. 여하한 경우에도 적에게 서울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 전쟁 예방이 행정수도 건설의 진짜 목적

박정희가 행정수도 건설을 구상한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안보상의 이유였다. 그는 “서울을 이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6백만명을 넘겨서는 곤란하다”며 구체적으로 인구억제 목표를 정하기도 했다. 그가 이처럼 수도권 인구집중에 대해 신경을 썼던 것은 수도 전방 40km 앞에 휴전선을 두고 있는 안보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는 늘 “적의 지상포화 사거리내에 6백만명의 서울 시민이 살고 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군인 출신으로 탁월한 전략가인 그는 이같은 점이 적과의 대치 상황에서 안보상 절대적 취약 요소라는 점을 너무 잘 깨닫고 있었다.

만일 북한이 기습공격을 감행해 온다면 아무리 대비를 잘한다 해도 초전에 서울이 함락될 가능성이 높다.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보다 몇 배의 방어력을 갖춘다 해도 기습공격에는 방어선이 뚫릴 수밖에 없는 것이 병법의 기초다. 서울이 함락된다면 반격을 감행한다 해도 한강을 두고 일진일퇴를 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선(戰線)
이 한강을 중심으로 고착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국제사회가 개입해 다시 휴전하라는 압력이 거세질 것이다. 그 결과 휴전이 이뤄진다면 한강이 경계선이 되는 새로운 휴전선이 그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남한으로서는 얻는 것이 무엇인가. 국부(國富)
의 60%가 몰려 있는 서울이 폐허가 되는 것은 물론 서울의 반쪽이 북한에 넘어가게 돼 말이 휴전이지 사실상의 패전을 감수해야 하는 꼴이 된다. 다시는 회복할 희망이 없는 궤멸적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박정희는 보았다. 군인답게 항상 북한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국가를 경영해 왔던 박정희에게는 적의 야포 비사거리(飛射距離)
내에 수백만명의 국민을 살게 하는 것이 항상 불안스러웠던 것이다.

그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함으로써 기습침공을 통해 서울을 일거에 점령하고자 하는 적의 유혹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행정수도 건설을 통해 남한정부의 지휘부가 남쪽에 자리잡게 되면 서울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고자 하는 북한의 기습공격 메리트가 그만큼 반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정권 이후에도 남북의 대치상황은 크게 호전된 것이 없다. 오히려 5공 전두환 정권시절에 아웅산사태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는 위기상황을 맞기도 했다. YS시절에도 미국은 북핵시설의 폭격을 계획한 적이 있다. 만일 폭격이 이뤄졌다면 남북은 전쟁상황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북한은 남한을 적화시키겠다는 대남(對南)
전략을 지금껏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그같은 목표를 수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박정희 이후 역대정권은 이같은 남북대치상황에 눈을 감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명백한 증거가 수도권정책의 단계적 포기를 들 수 있다. 김영삼 정권에 와서는 서울을 국제도시로 만든다는 명분으로 수도권집중 억제시책을 사실상 포기한다. 역대정권의 이같은 무관심으로 박정희시대 최우선 정책이던 수도권 인구집중 억제시책들이 박정희 사후 하나둘 폐지되기 시작했다.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행사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규제완화의 이름으로, 또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인구집중 억제시책들을 하나둘씩 폐지했다.

그 결과 수도권 인구집중은 가속화돼 99년 현재 약 1천5백만명의 인구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전인구의 35%가 수도권에 몰려 있는 것이다. 수도권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악화돼 있다. 현재 우리의 수도권문제는 국가경제의 심각한 아킬레스 건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경쟁국보다 높은 물류비용, 도심 집중에 따른 혼잡비용, 환경악화에 따른 비용 등 추락하고 있는 국가경쟁력 약화의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가 97년말 IMF경제위기를 맞은 근본적 원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국가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한 수도권 규제완화 조치들이 궁극적으로 이렇듯 국가경쟁력 약화를 초래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행정수도 건설과 관련해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입지와 관련한 미스터리다. 행정수도를 새로 건설한다면서 입지조차 발표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입지를 정하지 않고 도시 건설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오원철 수석의 증언을 들어보자.

[정재령 월간중앙 차장] 월간중앙 제 288호 199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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