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02) 장다오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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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둬츠(왼쪽 첫째)는 쉬베이훙이 이름을 지어 준 세 명의 여인 중 한 사람이었다. 민국 최고의 여류화가 중 한 명이었다. 부모의 반대로 쉬베이훙과 헤어졌고 1949년 대만으로 나왔다. 미국 의회 로비스트 천샹메이(뒷줄 오른쪽 둘째), 메이란팡의 수제자인 경극배우 구정치우(뒷줄 오른쪽 셋째)를 비롯해 작가 린하이인(앞줄 오른쪽 첫째) 등과 친했다. 1950년대 초 타이베이. 김명호 제공

쉬베이훙(徐悲鴻·서비홍)과 장비웨이(蔣碧微·장벽미)가 프랑스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중국인 유학생 사회가 술렁거렸다. 장비웨이를 먼발치에서라도 본 사람이 대화를 주도했다. 쉬베이훙에게 인사 오는 사람마다 힐끔거리며 장비웨이를 쳐다봤다.

장다오판(張道藩·장도번)은 장비웨이를 보는 순간 호감을 느꼈다. “온몸에 교양이 넘쳤다. 목소리도 일품이었다. 무슨 말을 하건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쉬베이훙은 “수많은 동물들을 놔두고 석고상과 씨름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스케치북을 들고 동물원에 가 있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장다오판은 용케도 알고 장비웨이를 찾아와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 달라고 졸라댔다. 근 6년을 그랬다. 취향이나 식성도 쉬베이훙과는 정반대였다. 둘은 죽이 잘 맞았다. 장비웨이는 단골 세탁소 집 딸을 장다오판에게 소개시켜줬다. 예쁜 프랑스 여자였다. 직접 나서서 두 사람의 결혼 날짜까지 잡아 줬다. 약이 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1926년 2월, 장비웨이는 피렌체에서 스케치 여행 중이던 장다오판의 편지를 받고 당황했다. “파란 눈의 여자가 나를 좋다고 하지만 나는 싫다. 오래전부터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 감히 말을 못 할 뿐이다. 나와 같은 감정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회답을 바란다.” 장비웨이는 자중, 자애하라며 절교편지를 보냈다. 쉬베이훙에겐 내색도 하지 않았다.


▲정계에 투신한 장다오판은 국민당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50년대 초 입법원장 시절의 장다오판.

장다오판은 구이저우(貴州)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영국 유학까지 떠난, 쉬베이훙 못지않게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장비웨이의 답장을 받자 프랑스 여인을 데리고 귀국해 버렸다. “난세에 그림은 무슨 놈의 그림이냐”며 미술 도구들을 지나가는 거지에게 던져주고 정계에 투신했다. 국민당 최대의 파벌인 C·C계의 중심인물로 정보부문을 장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이듬해 봄 쉬베이훙은 싱가포르를 거쳐 귀국했다. 6개월 후 장비웨이도 프랑스 생활을 마감했다. 배가 상하이 항에 도착했을 때 장다오판이 장미꽃을 한 다발 들고 서 있었다. 쉬베이훙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서예가 황먀오즈(黃苗子·황묘자)가 당시를 목격했다. 1990년 여름, 홍콩의 명가한묵(名家翰墨)이 쉬베이훙 특집을 발행하던 날 43년 전을 회상했다. “정말 가관이었다. 장다오판은 어쩔 줄 몰라 했고, 장비웨이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넋 나간 사람들 같았다.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장다오판의 프랑스 부인이 나타나 장비웨이를 끌어안고 반가워했다. 혼자 보기 아까웠다. 우스워 죽는 줄 알았다.” 장다오판이 멋쩍어하며 그동안 써놨던 편지 꾸러미를 건네자 장비웨이는 쭈빗거리며 받았다.

남경중앙대학 예술과 교수 쉬베이훙도 미술에 천부적인 자질을 갖고 태어난 예쁜 여학생을 발견했다며 나름대로 바빴다. 10년 전 장비웨이에게 했던 것처럼 이름을 선사했다. 20세기 중국 6대 여류화가의 한 사람인 쑨둬츠(孫多慈·손다자)의 출현이었다. 쑨둬츠 한 사람만 놓고 수업하는 날이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처럼 소문이 빠른 나라도 드물다. 중앙대학과 난징(南京) 시내는 물론이고 전국의 예술계에 소문이 퍼졌다.

쉬베이훙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거실 벽에 “홀로 편견을 견지하며(獨持偏見), 뭐든지 내 고집대로 하겠다(一意孤行)”는 대련(對聯)을 대문짝만 하게 걸어놓고 “명예와 금전을 위한 창작을 하지 않고, 세상에 아부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며 의아해하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실제로 쉬베이훙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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