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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일본 신용등급 추락, 남의 일이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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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이 ‘AA-’로 내려간 것은 놀랄 일은 아니다. 예고된 재앙(災殃)이다. 일본의 신용등급은 1975년 AAA를 받은 이후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꾸준히 나빠졌다. 물론 일본의 등급은 여전히 한국보다 높다. 그러나 중국·대만과 같은 등급이며, 재정불안에 시달리는 스페인보다 낮은 수준이다. 경제대국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가장 큰 원인은 재정 악화 때문이다. 일본의 누적 정부 부채가 1000조 엔을 넘어 국내총생산(GDP)의 200%를 웃돌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렇게 엄청난 재정적자가 쌓인 경우는 없었다. 일본이 재정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세금을 늘리려면 우리의 부가가치세와 같은 소비세 확대 말고는 방법이 없다. 일본은 1989년 3%의 소비세를 도입했다가 이듬해 자민당 정권이 무너졌다. 1997년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는 소비세율을 5%로 올린 뒤 총선에서 참패했다.

 일본 정치가들이 소비세의 ‘소’자도 꺼내지 않는 것은 이런 두려움 때문이다. 조세저항으로 정권이 무너졌던 공포에 짓눌려 있다. 그렇다고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일본은 지금의 사회보장 수준을 유지하면서 재정상태를 개선시키려면 소비세를 최고 17%까지 올려야 한다. 문제는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다. 집권 초기 소비세를 거론하던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도 지지율이 곤두박질하자 입을 닫았다. 그는 국가 신용등급 하락에도 “사안을 잘 모르니 다음에 얘기하자”며 발을 뺐다.

 해결책이 뻔히 나와 있는데도 누구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오늘의 일본이다. 그렇다고 당장 큰 일이 터질 상황은 아니다. 적자 국채의 대부분을 국내 기관투자가와 개인들이 소화해주고 경상수지 흑자 기조가 유지되니 문제를 그냥 덮어둘 뿐이다. 대신 일본 정치권은 나랏돈은 펑펑 썼다. 역대 자민당 정권은 경기 부양을 핑계로 마구잡이식 토목공사에 매달렸다. 2009년 발족한 민주당 정권도 자녀 보육수당, 고교 교육 무상화, 고속도로 통행료 무료화 등 무상복지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이러니 일본의 나라 빚은 올해도 54조 엔 늘어날 전망이다. 여기에다 일본 경제는 늙어가고 있다. 내년부터 단카이 세대(團塊世代·1947~49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700만 명에 대한 연금지급이 개시되면서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일본의 재정 악화는 우리에게 강 건너 불이 아니다. 한국의 정부 부채 역시 가파르게 증가해 2030년엔 1000조원에 육박할 전망이다. 정치권의 무상복지 싸움이나 고령화 사회의 진입도 일본과 공통점이다. 이대로 가면 제2의 일본이 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증세는 외면한 채 나랏돈으로 선심 쓰는 국가는 언제나 똑같은 몰락의 길을 갔다. 그런 경고의 빨간 불이 한 발 앞서 이웃나라 일본에서 켜졌다. 우리 정치권은 눈을 똑바로 뜨고 일본을 바라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