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삼성과 카도가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삼성과 카도가와. 각기 자국의 전자 산업과 출판 시장을 대표하는 서로 성격이 다른 메이져 기업 정도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닮은꼴을 몇 가지 찾아낼 수 있다. 먼저 설립자의 2대째가 현재 대표자가 되어있다는 점. 결과적으로는 두 기업 모두 장남이 그룹을 승계 받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선대 회장의 주력 사업 보다 2대 회장의 신종 사업(삼성:자동차 & 카도가와:영상) 때문에 그룹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것까지 상당히 유사한 노선을 걸어왔다.

특히 삼성의 자동차 산업 진출과 카도가와의 영상 산업 진출은, 이미 오래 전서부터 세계적인 자동차 매니아로 정평이 나있었던 이건희 회장과 어린 시절부터 영화 감독이 꿈이었던 카도가와 하루키 회장의 필생의 숙원이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이러한 양 그룹 총수의 개인적 야심은 삼성 자동차가 남긴 국민 경제적 피해와 90년대 초반 카도가와 대작 영화들의 연이은 흥행 참패.1) 에 의해 씁쓸한 말로(하루키의 경우 마약 밀매 스캔들까지 겹쳐 회장직 박탈)를 맞이해야 했지만, 삼성과 카도가와의 닮은꼴에 대해 재차 확인해 볼 수 있는 대목인 셈이다.

〈알렉산더, アレクサンダ-戰記〉의 제작 발표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단지 이 작품의 화려한 스탭 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삼성과 카도가와라는 양국의 닮은꼴 대기업이 뭔가 함께 일을 벌인다는 자체가 매우 흥미진진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는 카도가와 하루키가 석방 이후 모 그룹인 카도가와 서점에서 분가(카도가와하루키 사무소로 완전 독립)하면서 까지 재기에 강한 의욕을 보인 시점이었고 삼성 역시 영상사업단 발족 이후 가장 심혈을 기울인 국제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였다. (이 무렵 일본의 주요 일간지 문화면 기사들을 찾아보면 일본 내에서도 상당한 이슈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하루키와의 의리를 져버리지 않으려는 린 타로 감독이 준비중이던 〈메트로 폴리스〉의 제작을 미루면서 까지 프로듀서로 자원해 주었고 그러자 린 타로의 팬이었던 재미 교포 애니메이터 피터 정까지 어렵지 않게 한 팀이 된다. 또한 작품의 퀄리티에 관한 한 최고 수준을 보증하는 매드 하우스 & DR MOVIE가 제작 파트너로 내정됨에 따라 기대는 더욱 고조되었고 이것은 〈알렉산더〉의 첫 번째 프로모션 필름의 압도적인 완성도에 의해 다시 한번 공증된 바 있다.

그야말로 애니 매니아들에게는 세기말의 화제작이 될 법했던 이 작품이 지난 9월 일본에서 소리 소문 없이 TV 방영되었다. 그나마 공중파 방송도 아니고 별도의 디코더를 장착해야만 시청이 가능한 상업 위성 방송 WOWOW의 심야 시간대에 쥐도 새도 모르게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2)

물론 최근에는 방송이 선 매체가 되고 비디오가 후 매체가 되는 형태로 소프트웨어 시장이 개편되고 있는 추세이지만, 〈알렉산더〉의 경우 극장 개봉까지 염두 해 두었던 대작 OVA였다는 점에서 비디오 장사도 해먹기 전에 방송에 풀어 버렸다는 것은 뭔가 곡절이 있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알렉산더〉의 진로 이탈 가능성은 본 편 제작 초기부터 재기되어 왔던 문제였는데, 그 중에는 스탭 라인 선정 상의 미스 매치가 안고 있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 〈알렉산더〉의 감독으로 지명되었던 가네모리 요시노리는 린 타로 감독의 수제자 중 한 명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의 전공은 〈야와라〉이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 가와지리 요시아키나 하마자키 히로쯔쿠, 치기라 코이치 등이 적임자로 사료)

그런데 몇몇 국내 영화제에서 일부 공개된 〈알렉산더〉의 본편 퀄리티를 살펴보면 연출상의 문제보다는 작화 상의 언밸런스 함에 더욱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이 같은 느낌은 캐릭터 디자이너가 작화 감독을 맡지 않은 경우 발생하게 되는 가장 나쁜 결과중 하나인데(ex. 싸이버 포뮬러 제 1기 시리즈) 더군다나 피터 정의 형이상학적(?)인 그림 체를 관리해낼 작화 감독은 역시 피터 정 본인 밖에는 없지 않았나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은 열심히 만든 흔적을 장면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난항 속에서도 매드 하우스 & DR MOVIE의 애니메이터들은 전 13부 작의 장기 스케줄을 우직하게 밀고 나간 듯 싶고 무엇보다 원작자인 아라마타 히로시와 디자이너 피터 정의 얼터너티브 한 세계관만은 작품 안에 그대로 살아 있어서 이제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아왔던 미국과 일본의 만화영화와는 다른 느낌의 독창적인 결과물로 일단 완성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알렉산더〉에게 최종적으로 실패작이었다는 보고서가 작성된다면 그것은 제작상의 문제가 아닌, 완성된 결과물을 보고 판단(성공작인지 실패작인지)할 기회조차 마련해 주지 않은 배급 사. 바로 삼성과 카도가와의 책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도 양 사에게 불가항력적인 악재들이 있었음을 안다. 삼성의 경우 IMF 경제 난국의 여파로 영상사업단이 해체되면서 배급 업무는 물론 막바지 국내 제작 일정까지 차질을 빗게 되었다. 카도가와하루키 사무소 역시 과거와 같은 융단 폭격 성 언론 플레이를 할 수 없는 상황(Anima.ge는 예전부터 천적 관계였고 Newtype은 이제 한 가족이 아니기 때문) 속에 정작 중요한 만화영화 잡지들에게 철저히 외면 당하면서 작품을 홍보할 수 있는 채널을 찾지 못하게 된다.(그나마 독자층이 얇은 SONY AX지에 간간이 기사화)
결국 양국에서 엄청난 화제를 모아야했을 한일 합작 만화영화 〈알렉산더〉는 완성이 되었음에도 소문조차 나지 않은 잔치로 끝나버리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으며 이것은 일본 대중 문화의 개방 이후 발전적인 교류가 요망되는 한일 만화영화계에 커다란 상처 자국이 될 듯 싶다.

부디, 나름대로 큰 의미를 지니고 만들어진 이 한편의 만화영화가 관계자들의 합리적이고 현명한 판단 하에 최소한 작품을 고대해 온 대중들에게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길 진심으로 바램 해 본다.

1) 80년대 증흥기를 맞이했던 카도가와 영화는 지난 1990년 일본 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50억 엔을 투여해 완성한 대작 영화 〈하늘과 땅과〉의 예정된 흥행 실패(적자를 감수하며 영화를 만드는 것이 카도가와 하루키의 무서운 점) 이후 급격한 퇴조기를
맞이하게 된다.
때문에 카도가와 하루키가 마약 밀매 혐의로 구속된 직후, 회장이 된 차남 카도가와 쯔구히코는 영상 사업 축소 방침을 내비치게 되고 카도가와 영화는 사실상 단종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런데 지난 1998년 카도가와 서점 창립 50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구색을 맞추기 위해 제작한 공포 영화 〈링〉의 예상치 못한 흥행 대성공(이것 역시 삼성의 '쉬리' 성공과 닮은꼴?)으로 카도가와 영화의 부활을 부추기게 되고 이후 〈라센〉, 〈링 2〉, 〈사국〉, 〈링 ZERO, 2000년 1월 1일 개봉 예정〉 등이 연이어 화제리에 제작되고 있다.

2) 그나마 희망적인 부분은 코야나기 유키가 부른 〈알렉산더〉의 영어판 주제가 'You were mine'이 일본의 음악 전문 채널 MUSIC FREAK TV의 FUTURE ANIMEX 차트에서 2주 연속 1위를 달리며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고무된 것인지 카도가와하루키 사무소 측은 연말 크리스마스 특작으로 〈알렉산더〉의 OVA 발매 및 극장 편집판의 일본 내 공개(내년 예정)를 강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도 늦게나마 공식적인 배급이 이루어지길 다시 한번 바램 해 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