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친구ㆍ가족끼리 집 합치고… 전세 난민 속출"

조인스랜드

입력

업데이트

[함종선기자]

지난 7일 오전 국민은행 서울 여의도영업부. 인근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권모(42)씨가 은행 직원과 전세대출 상담을 하고 있다.

권씨는 “2년전부터 살고 있는 아파트의 전셋값이 1억2000만원이나 뛰었다”며 “집주인에게 사정해 1억원 올리는 선에서 재계약하기로 했고 부족한 자금은 대출로 충당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 은행 지용규 과장은 “갑가지 오른 전셋값을 대출로 마련하려는 직장인들이 요즘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은행을 나와 권씨가 살고 있다는 서울 문래동의 문래 자이 아파트 단지를 찾았다. 단지 앞 중개업소에 들어가 “115㎡형(이하 공급면적) 전세를 찾고 있다”고 말했더니 “전화번호를 남기고 기다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 중개업소 이해춘 공인중개사는 “전셋집이 나오면 바로 연락을 달라는 대기자가 10명”이라며 “지난해 말부터 세입자가 몰려 전셋값이 급등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아파트 115㎡형 전셋값은 2년 전 2억2000만~2억3000만원에서 지금은 3억4000만~3억5000만원으로 올랐다.

전셋값이 급등하면서 셋집살이를 하는 서민의 살림살이가 팍팍해지고 있다. 국민은행 조사에 따르면 서울 전셋값은 2009년 6% 오른데 이어 지난해에는 6.4% 뛰었다.

올 1월 첫째주에도 0.2% 올라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웬만한 중소형 아파트는 2년전보다 대부분 5000만원 이상 오르고 강남권은 2억원이나 급등했다.

묻지마 계약, 사전예약 늘어

전셋값 급등은 다양한 현상을 낳고 있다. 가장 흔한 게 ‘묻지마 계약’이다. 2390가구의 대단지인 서울 서초동 삼풍아파트의 경우 112㎡형이 1050가구나 되지만 이 중 전세물건은 한 두건 뿐이다.

서초동 오현숙 공인중개사는 “지난해 가을까지만 해도 수리가 잘 된 집만 전세가 나갔는데 요즘엔 물건이 나오면 바로 연락을 달라는 수요자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이 아파트 112㎡형 전셋값은 2년 전 최저 1억8000만원에 계약됐지만 지금은 3억3000만~3억5000만원으로 급등했다.

‘사전 예약’도 늘고 있다. 서울 행당동 강영화 공인중개사는 “올 5월 입주하는 서울 행당5구역 푸르지오 전셋집을 예약하려는 수요자들의 상담이 끊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다음달 입주가 시작되는 서울 공덕동 공덕래미안5차의 경우 80㎡형 전세 물건은 2억5000만원 안팎에서 거의 계약이 끝났다. 남은 물건은 2억9000만원으로 전셋값을 크게 올린 집 뿐이다.

전세 물건이 귀해지자 값을 크게 올린 배짱 물건이 늘어났다. 서울 대치동이나 목동 등 학원가 밀집지역에서 흔하다.

목동의 김현승 공인중개사는 “지난해말 1억4000만원선에 계약되던 목동 신시가지 66㎡형 전셋값을 1억9000만원으로 올리기도 한다”며 “문제는 워낙 물건이 없다 보니 터무니 없는 가격이라도 실제 계약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 서울 길음동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에 매물 안내문 대신 전세 물건을 찾는다는 광고문이 붙어 있다.

자기집 있으면서 새로 전셋집 구하는 풍선 효과도

올해는 풍선 효과도 나타난다. 다른 곳에 자기 집을 갖고 있으면서 자녀 교육 때문에 서울 대치동이나 목동에 새로 전셋집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학원가 밀집 지역의 전셋값이 급등하자 자기가 세를 놓은 집의 전셋값도 따라서 올리는 것이다.

목동 트라팰리스 139㎡형에 전세 살고 있는 신모(48)씨가 그런 경우다. 신씨는 “2년 전 4억5000만원에 계약했던 전셋값을 집주인이 6억3000만원으로 올려달라고 해 내가 갖고 있는 경기 광명시의 중형 아파트 2채의 전셋값도 올려서 내놨다”고 말했다.

월세 물건이 늘어나는 것은 저금리 현상 때문이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집주인이 은행 이자보다 높은 임대수익을 올릴 수 있는 월세를 선호하는 것이다.

세입자 입장에서도 오른 전셋값 만큼 목돈을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에 월세를 대안으로 삼는 것이다. 서울 잠실동 김세빈 공인중개사는 “잠실 리센츠 단지의 경우 109㎡형이 3590가구나 되지만 전세는 3~4건 뿐이고 월세는 12~13건이나 된다“고 전했다.

동료나 가족끼리 전세 합치고 외곽으로 빠지고

주인이 집을 팔면 바로 집을 비워줘야 하는 ‘매매 조건부 전세’도 생겼다. 서울 서초동의 S아파트에 전세 살고 있는 민모(39)씨는 “집이 팔리면 비워주겠다는 각서를 쓰고 겨우 전세 기간을 연장했다”고 설명했다.

오른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해 동료나 가족끼리 집을 합치는 ‘쉐어(Share) 하우스 족’이 늘고 있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서울 삼선동 서영기 공인중개사는 “오피스텔 전셋값이 오르다보니 직장 동료나 친구 2~3명이 함께 살 집을 찾기도 한다”고 전했다.

개업의 신모(40)씨는 어머니와 살림을 합쳐 대형(206㎡) 전셋집을 얻었다. 그는 어머니와 같은 동네 112㎡형 전셋집을 각각 얻어 따로 살았다. 신씨는 “대형 전셋값이 중형보다 싸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외곽으로 이사하는 ‘전세 난민’은 많이 늘었다. 지난해까지 새 아파트 입주 물량이 많아 세입자 구하기가 어려웠던 경기도 용인ㆍ고양ㆍ파주시 등은 최근 서울에서 이사오는 수요자들로 인해 전세가 속속 계약되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복정동 이갑식 공인중개사는 “서울 강남의 세입자들이 많이 찾는 바람에 방 2개짜리 다가구주택 전셋값이 지난해 말 1억원에서 최근 1억1000만원 정도로 뛰었다“고 전했다.

잘못된 수급이 만성 전세난 불러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어진 전세난에 마땅한 해결방안이 없어 세입자들의 불안심리가 가중되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 전세시장이 만성 피로에 쌓인 것이다.

전셋값이 오르는 가장 큰 원인은 수급 불균형이다. 2008년 시행된 분양가상한제로 민간건설업체들이 아파트 분양을 크게 줄이면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새 아파트 입주 물량이 급감하고 있다. 경기도 새 아파트 입주 물량은 지난해 11만3121가구에서 올해 4만9642가구로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전세난이 심한 서울 강남권의 경우 올해 입주 물량이 2000가구도 안된다. 이런 가운데 저금리가 지속되면서 다주택 보유자들이 전세 물건을 월세로 돌리고, 재개발·재건축 사업으로 주택 멸실이 늘어나는 것도 전세 수급 상황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주택수요자들의 주택 매수 심리 위축도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소득 대비 너무 오른 집값 등을 감안할 때 집값이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오르기 힘들다고 판단한 수요자들이 집을 매입하는 대신 전셋집을 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건설산업연구원 허윤경 연구위원은 "전세시장의 단기 수급불균형이 불가피한 상황이어서 올해 내내 전세시장이 불안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저작권자(c)중앙일보조인스랜드. 무단전제-재배포금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