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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테마 읽기] 다시 보는 한국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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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 2
백선엽 지음, 중앙일보, 469쪽, 2만원

월터 샤프 현 사령관을 비롯한 역대 주한미군 사령관들이 한국 부임 직전 통독하고 오는 저술이 한 권 있다.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91)의 영문판 회고록 『From Pusan to Panmunjom(부산에서 판문점까지)』이 그것이다. 릿지웨이 장군과 밴 플리트 장군 서문이 들어 있어 무게를 더하는 이 책은 1999년 미국 포토맥북스에서 출판된 전쟁증언록 시리즈 중 하나다. 샤프의 전임자 벨 사령관은 이 책을 세 번 통독했다고 2006년 취임 때 밝히기도 했다.

 일반 장교도 예외가 아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근무하는 백 장군이 간혹 이웃 미 8군 영내를 방문하면 병사들이 멀리서도 달려온다. 거수경례와 함께 가슴 속의 이 책을 내놓으며 저자 서명을 요청하는 일이 흔하다는 게 백 장군을 모시는 이왕우 보좌관의 말이다. “한 번은 브렉켄리지라는 미군 대위가 『From Pusan to Panmunjom』을 내밀었는데, 새까맣게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장군님의 부드러운 전시 리더십에 감명 받았다며 질문을 쏟아냈다.“

 이 책은(이하 『나를 쏴라』) 백 장군 한국전쟁 회고의 확대편이자, 최종 버전이다. 전 3권으로 구상된 단행본의 두 번째이기도 하다. 미군들이 읽는 영문저술은 22년 전 한글 판 『군과 나』(당시 제목 『길고 긴 여름날-1950년 6월25일』)를 번역한 것인데, 그게 장편소설이라면 『나를 쏴라』는 대하소설이다. 분량도 확대됐지만, 훨씬 입체적이다. 전투사 중심에서 벗어나 한국전쟁 전반을 훑으며, 건국 전후 맥락까지 담아냈다. 건국 이후 현대사 증언으로 손색없는 건 그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대장이 서울 전쟁기념관 앞에 서 있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사성장군이자, 역대 주한미군 사령관들의 필독서가 된 영문판 전쟁회고록을 냈었다. 먼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머릿속에는 건국 과정부터 1950년대까지 자신이 몸으로 헤쳐온 한국 현대사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오가지 않을까. [김태성 기자]

제2권에서 그런 성격이 더욱 잘 드러난다. 백 장군은 1군단장으로 재직하던 중 휴전협정 대표로 참석했기 때문에 당시 일화가 자세하다. 자기네 의자의 키를 높이는 등 인민군이 “조잡한 심리전”(134쪽)에 몰두했던 일화는 조금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결같이 모질고 경직됐던 그들 태도를 짚어낸 대목이 인상적이다.

 신문기사에 나왔던 대로 한 번은 회담 중 북한 대표 셋 중의 하나인 이상조의 얼굴에 왕파리 한 마리가 붙어 이리저리 기어 다녔다. 손을 내저어 내쫓는 게 자연스러웠지만, 이상조는 달랐다. 자기가 강하다는 걸 과시하고 싶어 파리 한 마리와 엉뚱한 기 싸움을 벌였고, 유엔 측 대표의 냉소만 샀을 뿐이다. 반면 중공군 대표 셰팡 등은 “조용히 웃음을 머금고 속으로 기민하게 두뇌를 회전하는”(149쪽) 큰 대조를 보였다. 그건 비유이자 암시다. 인민군이 전쟁 내내 경직된 소련식 정공법을 선호했다면, 중공군은 변칙에 능했다. 인민군이 직선이라면, 중국은 곡선이라는 해석도 등장한다.

 한국전쟁 2년 전에 터진 제주도 4·3사태와 여순반란사건도 이보다 충실한 증언은 흔치 않다. 모두 5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1장 ‘동쪽을 사수하라’, 2장 ‘그들만의 협상’, 3장 ‘반란의 계절’, 4장 ‘아군 속의 적군’이 여기에 할애된다. 가장 많은 분량이 5장 ‘지리산의 노을’이다. 백 장군은 51년 말 이후 빨치산 토벌 100일 작전을 벌였던 백(白)야전전투사령부의 지휘자. 건군 이후 지금까지 지휘자 이름을 딴 부대는 그게 유일하다.

 그 부대의 활약상이 이 책의 또 다른 백미인데, 그건 전투가 리얼해서가 아니다. 당시 작전은 민심을 얻어 승리했다. 마을 전체를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 등 무모한 기존 전술을 물리쳤고, 빨치산이라면 무조건 사살하던 데서 벗어나 생포 방식도 그가 도입했다. 작전 초기 부하의 실수로 한 마을이 불타자, 마을 노인들 앞에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하며 땅에 엎드려 사죄하는 모습, 그게 인간 백선엽의 모습이다. 지리산 주변 고아들을 거둬들이기 위한 육아원 설립도 그의 뜻이었다.

 책에는 지난해 어버이날 머리 허옇게 변한 육아원 출신들이 ‘대장 아버지’를 위해 축하연을 벌인 일화까지 등장해 가슴 뭉클하다. 그게 포인트다. 지난 정권 만들어졌던 각종 과거사위원회가 백 야전사령관의 빨치산 토벌 당시 잔혹행위를 캐려 했으나 한 건도 찾지 못했던 이유도 이 책에 모두 들어있는 셈이다. 안타까운 건 그 대목이다. 같은 소재를 다뤘던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이태의 『남부군』 등이 지금도 읽히고 있기 때문이다.

 균형감각을 가진 이 책의 등장이 이런 풍토를 바로 잡아줄 것으로 기대된다. 즉 이 책은 기왕의 빨치산 출신의 수기나 건국과정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넘어 표준이자 정통으로 평가 받기에 유감 없다.

시원시원한 도판에 유장한 서술이 인상적인 이 책은 20세기 판 이순신의 『난중일기』로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는 장군의 구술을 옛 자료와 확인하고 정리해낸 이(본지 유광종 기자)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다.

 『나를 쏴라』 1권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나는 병역을 이미 마쳤지만, 백 장군을 모시는 당번병의 자격을 준다면 다시 한 번 군대에 가고 싶다.” 대학생 변종국(연세대)씨의 이 말은 젊은 세대들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이제 관심은 제3권이다. 백 장군이 본지에 연재 중인 ‘남기고 싶은 이야기’의 제목은 ‘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인데, 요즘은 한국전쟁 편을 마무리 짓고 50년대 증언이 펼쳐지고 있다. 왜 50년대가 분단 고착화의 시기가 아니라 60~70년대 경제성장의 예비기인지에 대한 구체적 증언에 관심이 간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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