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커 퇴장 … 오바마, 월가에 굴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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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파이터’ 폴 볼커(83·사진) 전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이 백악관을 떠난다. 5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은 볼커가 대통령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위원장직을 사임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의 경제 자문역으로 활약해 온 그는 대형 금융사들에 족쇄를 채운 이른바 ‘볼커 룰’을 주장, 월가와 대립각을 세워왔다. 로이터는 측근의 입을 빌려 “사임은 볼커 위원장이 결정했으며, 앞으로도 오바마 대통령이 원할 때마다 비공식 자문을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집권 후반기를 맞아 백악관에 월가 출신 등 ‘친(親)기업’ 인사들이 다수 포진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라 그의 퇴장을 예사롭지 않게 보는 시각이 많다.

 1979~87년 연준 의장을 역임한 볼커 위원장은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연준 의장에 오른 뒤 내외의 격렬한 반발에도 ‘대학살’로 불릴 만큼 과감한 금리인상을 통해 당시 두 자릿수에 달하던 물가 상승률을 결국 끌어내렸다. 이를 통해 ‘인플레 파이터’란 명성도 얻었다.

 하지만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금융 규제 완화 정책에 맞서다 결국 연준 의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도록 한 법(글래스-스티글 법) 폐지에 반대한 게 결정적이었다. 이를 두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레이건 대통령이 볼커를 해임하고 대신 JP모건과 인연이 있는 앨런 그린스펀을 의장에 임명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퇴임 이후 변방에 머물던 그는 오바마 정부 출범과 함께 다시 중심부로 복귀했다. 2008년 오바마 후보 캠프에 참여한 그는 대통령 비서실을 거치지 않고 오바마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주요 경제 참모였다. 이런 영향력을 바탕으로 그는 ‘금융시장은 적절히 규제돼야 한다’는 그의 소신을 관철시키려 했다. 예금을 받는 시중은행이 자기자본을 활용해 투자하는 등 위험한 투자에 나서지 못하도록 하자는 ‘볼커 룰’은 실제로 지난해 발효된 금융개혁법에 상당 부분 반영됐다.

 소신이 뚜렷하고 발언에 거침이 없었던 만큼 그를 둘러싼 논란도 잦았다.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선 “은행권에서 혁신이라고 하는 것 중 쓸만한 건 현금 자동입출금기 하나뿐”이라고 비꼰 게 금융가에 회자되기도 했다. 지난해 연준이 ‘양적 완화’를 재개하기로 한 데 대해선 “별 효과 없이 인플레만 일으킬 것”이라고 비판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규제 완화론자인 로런스 서머스 국가경제위원회(NEC) 의장과도 자주 충돌했다. 한편으론 그 자신도 경제회복자문위원장이란 자리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백악관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진다며 난감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를 백악관에서 끌어내려는 월가의 반격도 만만찮았다. 월가에선 “볼커가 현장에서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 현대 금융 시스템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비아냥이 많았다. 금융사들은 한편으론 강력한 로비스트들을 동원, 볼커가 틀을 닦은 금융개혁법의 칼날을 무디게 하는 데 총력을 다했다. 집권 후반기로 접어드는 오바마 대통령으로선 월가의 집요한 반대를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금융시스템을 보다 안전하게 만들겠다는 정부의 약속은 금융업계의 반발에 꺾이고, 의원들은 은행 규제에 반대하고 나서고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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